명예를 찾아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그보족의 저항과 식량 안보의 유산 ‘에야 에불레

Writer : Christian Chukwuma Opata and Apex A. Apeh
Year : 2018


개요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이 나이지리아에서 농민 친화적이지 않은 다수의 법을 제정하자, 일부 이그보(Igbo)족 소작농들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노동력 징집(labour conscription)’이라는 수단을 통해 그러한 법을 회피하는 전략을 고안했다. 이러한 전략은 소작농과 임금을 받고 농사일을 하는 일꾼들 사이에 경쟁을 촉발했고, 이러한 경쟁으로 인해 이그보족 소작농 사회에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계층이 생겨났다. 재정적 보상이 현물이나 무형의 보상보다 중요해지는 큰 변화가 일어난 오늘날까지도 이 두 계층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본 연구는 이그보랜드(Igboland)의 전통적 지식을 활용하여 식민지 법에 맞섰던 농민들의 저항을 소개하고, 민족지학 조사, 포커스 그룹 토의, 문서 기록, 해당 관행에 참여했던 농부들의 자손과 진행한 인터뷰를 통해 그러한 저항의 유산을 보여주고자 한다.


서론

아프리카의 빈곤 문제를 다루는 학술적 논의는 주로 한 가지 설명만을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바로 식민주의이다.

“나이지리아의 경제사는 수치와 착취의 서사이다. 영국의 승인 하에 신탁 통치를 가장하여 아프리카에 들어와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목을 비틀었던, 소수의 보물 사냥꾼들의 이야기이다. 외국인들은 나이지리아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교육하지 않고, 나이지리아의 경제를 기형적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위의 인용문은 이그보족이 식민 통치의 경험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사실 모든 인간 사회에서 경제적 고려사항은 항상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며, 경제는 주인과 하인, 부자와 빈자, 돈을 버는 사람과 잃는 사람,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사회는 극단적인 것을 바탕으로 번영한다’는 토요(Toyo)의 주장은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프레드릭 쿠퍼(Fredrick Cooper)는 아프리카의 식민지 경험과 관련한 글에서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식민지화가 농촌 주민들을 빈곤의 수렁으로 더 깊이 밀어 넣었다”고 했다. 논리적으로 볼 때, 사람들은 특히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속았다고 느끼게 되면 무법 상태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무법 상태로 인해 경제의 양측에 위치한 사람들 사이에서 다툼이 발생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행동을 규제하는 규칙을 수립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정부 형태 하에서 입법의 과정과 그에 따른 법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심지어 법 앞에서도 착취와 지배가 발생하여, 전쟁과 갈등의 원인이 되곤 했다. 대부분의 갈등의 근원은 경제적 요인이다. 매닝 내쉬(Manning Nash)는 경제 시스템과 사회 시스템 간의 관계에서 경제 시스템은 사회적 행위의 시스템을 구성하는 일부에 불과하다고 상정한다. 또한 경제 시스템은 규범적 통합, 기능적 상호 의존성, 인과적 상호작용의 세 가지 방식으로 사회 시스템에 연동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핸더슨(Henderson)과 리드버(Ledebur)가 인용한 바야드 러스틴(Bayard Rustin)은 경제, 사회, 정치 제도의 관계를 보다 정확하게 묘사했다. “경제는 뼈이고, 사회 제도는 살이며, 정치 제도는 살과 뼈를 바탕으로 자라는 피부”라는 설명을 통해, 모든 공동체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경제임을 시사했다.

제 2차 세계대전에 관한 연구에서 데이비드 골드필드(David Goldfield) 등은 전쟁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은 1931년 일본이 중국 만주 지방을 침략하여 장악하고, 1937년에 전면적인 중국 침략을 감행하면서부터였다고 분석했다. 이들은 일본이 그러한 행동을 하게된 것은, 그들이 제1 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맞서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종료 후 영국, 프랑스, 미국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930년대 초반에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그러한 생각이 팽배했던 것이다. 일본은 그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영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를 아시아에서 몰아내고, 동아시아를 대동아공영권으로 재편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일본의 계획이 실현되면 강대국들이 아시아에서 경제적 발판을 잃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영국이 제 2차 세계대전 중에(특히 지중해 해로 봉쇄와 1942년 극동 지역 식민지 몰수 이후) 농민 친화적이지 않은 일부 법률을 제정한 이유를 이해하려면, 그 이전에 나이지리아에서 영국이 어떠한 경제적 지위를 보유했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또한, 왜 영국이 자국의 산업에 사용되는 자원을 생산해 온 현지 농민들의 이익을 무시하면서까지 나이지리아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A.J.P. 타일러(A.J.P. Taylor)는 1939년을 기준으로 10년 전에는 대영제국이 다른 유럽 산업 국가들에 비해 약골이었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1929~1939년에 독일의 제조업 생산은 27% 증가한 반면 영국은 17% 증가에 그쳤고, 구 소련은 400% 증가를 기록했다. 세계에 근대 산업혁명을 도입한 영국의 입장에서 이는 불길한 상황이었고, 따라서 강력한 경제적 이점을 지닌 지역을 단단히 붙잡고 있어야만 했다. 바로 이러한 상황 때문에 영국은 나이지리아에 의존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브라이언 가디너(Brian Gardiner)는 영국이 나이지리아를 ‘개방’한 주된 이유는 언제나 무역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영국은 1927년 나이지리아의 총수입의 62%, 총수출의 45.6%를 차지하는 등 나이지리아에 큰 경제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고 했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 이전에 나이지리아의 사업 환경에 큰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 중, 특히 1942년 이후에 나이지리아에 크게 의존했다. 또한 미국으로부터 그들이 바랬던 도움을 얻지 못했던 것도 나이지리아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이는 미국 시민들이 프랑스와 영국을 돕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이들 국가에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지지하는 미국 시민들은 37%에 불과했다. 영국은 이러한 상황 때문에 나이지리아 현지의 식량 생산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수출 작물을 생산하도록 강제하는 행정적, 강압적 조치를 도입했다. 농업은 ‘이그보족의 생명의 양식’으로 생각되었으므로, 농업 생산은 농민들의 결정과 지역 환경의 요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무엇을 심을지는 농부들이 선택했다. 이 시기 이전까지는 농부들이 어떤 작물을 재배할지 명령하는 법률이나 이그보랜드 외부에서 비롯된 부당한 영향은 일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 중에 영국은 나이지리아인들이 영국을 돕도록 압박했고, 이는 나이지리아 농부들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영향은 영국뿐 아니라 그 식민지 전역에도 미쳤다. 전쟁 중에 나이지리아는 영국 정부를 돕기 위해 넉넉하고 폭넓은 지원을 제공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카트시나(Katsina) 지역의 통치자(에미르, Emir)는 탱크 제작을 위해 개인적으로 5,000파운드를 지원했고, 이 탱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나이지리아 정부는 전쟁 수행을 위해 영국에 10만 파운드를 내놓았고, ‘전쟁 승리(Win the war)’ 기금을 통해 항공기 구매 자금 15,000파운드를 지원했다. 1942년 9월말 기준으로 나이지리아가 영국의 항공기 구매를 위해 제공한 총 지원금은 124,331파운드였다. 심지어 이는 런던 폭격 당시에 운영되었던 이동식 식당(mobile canteen)과 특별식품기동대(Flying Food Squad)는 포함하지 않은 액수이다.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대다수 유럽 국가들이 여전히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경제 불황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나이지리아의 전쟁 지원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다. 이들 국가들은 1차 세계대전의 경제적 혼란을 아직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2차 세계대전에 얽혀 들게된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이그보족의 지도자이자 나이지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민족주의자인 은남디 아지키웨(Nnamdi Azikiwe) 박사는 그가 발행하는 ‘서아프리카 파일럿(West African Pilot)’ 신문을 통해 이그보족의 지원을 독려하며, 전쟁 중 영국에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는 블랙 아프리카(black Africa)에 대한 독일의 태도를 공격했다. (독일인인) 카를로와(Karlowa)와 빌헬름 폰 알위르덴(Wilhelm von Alwurden)은 영국이나 프랑스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모든 아프리카인은 볼셰비키이며 몰살시켜야 한다는 글을 썼다. 이는 독일이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하에 있는 모든 아프리카인들을 파괴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는 아프리카에 가장 많은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했다. 1939년 1월 20일 아지키웨는 아프리카에 대한 독일의 태도와 관련하여 이렇게 썼다. “그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리세요, 나의 동료 아프리카인들이여. 하지만 계속 울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본국과 힘을 합쳐 공동의 노력으로 이러한 도전에 저항해야 합니다.” 이그보족과 나이지리아는 아지키웨와 같은 인물들의 촉구에 응답했으며, 이는 그들이 할당된 농산물 생산 목표를 모두 달성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이러한 농산물은 팜유(palm oil)와 팜 핵(palm kernel) 등을 포함하며, 특히 동맹국들이 극동 식민지를 잃었을 당시에 효과적인 전쟁 수행을 위해 생산되었다. 팜유 생산 목표는 37만톤, 팜 핵 생산 목표는 170,000개 였으며, 이 목표는 모두 달성되었다. 나이지리아인들이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도록 하기 위해 영국은 긴급하게 법을 제정했다. 이러한 법을 통해, 영국은 이그보족과 그 외 나이지리아인들이 해당 법과 조건에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전시 경제를 자국에 유리하게 조종할 수 있었다.

이러한 법을 상세하게 분석하기에 앞서, 식민 시대에 나이지리아에서 영국의 농업 정책에 대한 상반되는 논쟁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먼저 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M.O. 이제레(M.O. Ijere)와 같은 학자들은 영국인들이 농업 정책을 통해 나이지리아에 과학적이고 경제적인 새로운 농업 방법을 교육했으며, 현지에서 개발된 것보다 우수한 농기구를 수입하여 유통했다고 주장했다. 이와 반대되는 논지를 펼친 S.A. 쇼크페카(S.A. Shokpeka)와 O.A. 느와오코차(O.A. Nwaokocha) 등의 학자들은 영국의 농업 정책은 자국의 산업에 필요한 수출용 환금 작물의 생산에 중점을 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나이지리아 농민들은 환금 작물 생산에 집중하기 위해 식량 작물의 생산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점은 식민 통치에 대하여 이그보족이 보여준 저항의 본질에 관한 논의이다. (물론 이는 부수적으로 얻어진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농업 분야에서 이그보족의 식민 통치 경험이 반드시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루이스 화이트(Luise White)의 조언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바로 식민지 세계에 관한 글을 쓸 때는 식민지 사람들이 만든 이미지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특히 2차 세계대전 기간동안 영국의 나이지리아 경제 정책은 현지 소비를 위한 식량 작물 생산을 희생하면서까지 수출 작물의 생산을 강조했다. 이렇게 농업의 초점이 변화함에 따라, 나이지리아의 농촌 지역 뿐 아니라 신흥 도시 중심지에서도 식량이 부족해졌다. 많은 이그보족 상인들과 기업가들은 이러한 변화를 자신의 기업가적 능력을 시험할 기회로 보았다. 그들은 식량 작물 가격이 높은 지역에서 거래 기반을 마련하는 한편, 작물 가격이 낮은 지역에서 낮은 가격으로 작물을 매입했다. 그리고 이그보 출신 운송업자들과 동맹을 맺고, 주로 야간에 작물을 실어 날랐다.

이러한 행위를 제한하기 위해 영국은 1939년 나이지리아 방위 차량 운송 규정(Nigerian Defence Motor Transport Regulation)을 제정하여, 그러한 사업에 혈액을 공급했던 ‘동맥’을 끊어버렸다. 이 규정은 전쟁 중 상업용 차량을 여객 수송에 사용하는 것을 제한했을뿐 아니라, 식민지 정부가 새로운 차량, 타이어, 튜브, 예비 부품, 휘발유 판매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같은 이유로, 이 규정은 차량 사용자들에 대하여 휘발유 배급제를 도입했다. 물론 승용차와 개인 소유 차량은 차별하면서 농산품 수출에 사용되는 차량에는 특혜를 주었다. 이 규정에 등장하는 ’농산물 후송(Produce evacuation)’은 유럽으로 선적하기 위해 항구로 수송한다는 의미로만 해석되었다. 이러한 전시 입법과 통제로 인해, 이그보족의 경제 생활에 매우 중요한 주요 농산물인 야자수 제품(palm produce)와 카사바(cassava)가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 유럽에서 야자수 제품은 비누와 마가린 제조를 위해 필요했다. 또한 카사바는 전쟁 동안 특히 수요가 많았다. 카사바의 전분이 군복을 유지관리하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카사바와 야자수 제품의 교역을 제한하고 현지 소비를 억제하기 위해, 식민 당국은 1943년에 식량통제명령(Food Control Order)을 도입했다. 이 명령은 지구(district), 군(province), 심지어 지역(region) 간의 국내 생산품 교역, 특히 농산물 교역을 제한했다. 상인들은 상품을 자유롭게 수송할 수 없었으며, 이에 대하여 정부에 불만을 제기했다. 그들의 교역에 유리한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랬던 것이다. 불만을 제기한 사람들은 대부분 가리(garri, 카사바에서 파생된 농산물) 상인들이었다. 아바 지구 가리상인연합(Garri Traders Association of Aba)은 오웨리 군민(Resident of Owerri Province)들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여, 아바 지구에서 반출 가능한 가리 물량을 통제하기 위해 아바 지구장(District Officer)이 시행한 쿼터제 시스템에 실망감을 표시했다. 그들은 이 제도가 가리 교역을 약화시킬 것이며, 평범한 가리 상인들을 파산시키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그들의 삶을 ‘살 가치가 없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쟁 기간 동안 가리 교역에 대한 통제가 도입되고 이에 따라 카사바 생산이 통제되면서, 카사바 생산으로부터 노동력이 이탈하여 수출 가능한 유지류의 생산을 지원하게 되었다. 이러한 통제 조치로 인해 상인들의 수입이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특히 원래 이러한 농산품이 판매됐던 도심지에서 심각한 기아가 발생했다. 작물이 희소해짐에 따라 이용 가능한 상품에 대한 경쟁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상품의 가격 변화가 일어났다. 예를 들어 1943년 6월 나이지리아 북부에서는 가리 2컵이 1d에 판매되었는데, 이러한 규제 조치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같은 가격으로 10~15컵을 살 수 있었다. 이그보족이 속한 동부 지방에서는 가리 부족이 극심하여, 1944년 11~12월에 나이지리아 동부의 이코트 에크페네(Ikot Ekpene) 지구에서는 주민 5천명 이상(남녀 불문)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가리부족에 항의했다.

레자(Lejja) 지역의 소작농들 또한 이러한 통제 조치에 영향을 받았다. 이 조치가 도입되기 전에는 에뎀(Edem) 여성들이 가리를 만들 목적으로 레자 지역에서 카사바 괴경을 구매했지만, 조치가 도입된 이후에는 구매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자 지역의 농부들은 참마, 검은 콩, 옥수수 등 주식 작물 생산을 위한 경쟁을 시작했다. 이러한 저항의 유형은 매우 중요하며, 이러한 저항의 유산 중 가장 오래 지속된 것은 참마 농부들 사이의 경쟁이었다. 이 시기에 농민들이 참마 생산에 집중한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참마는 이그보에서 가장 중요한 작물로 간주되고 존중되었으며, 여전히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그보 소작농과 2차 세계대전 중 식량 생산의 정치학

나이지리아 동부 지역의 소작농들은 ‘건강한 삶을 위한 충분한 영양 식품의 가용성 및 접근성’이라는 식량 안보의 정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림 1]. 이 시기 내내 기아 문제가 너무나 심각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발생한 기아의 영향이 아직도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에 남아있을 정도이다. 이는 당시 지역의 식량 사정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서 유래한 속담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Aiga Oyibo vuteru urioto(백인의 전쟁은 영양실조를 가져왔다)’, ‘Adighi ajuafo ihe orii, maka ihere ji eme onu(위장에게 무엇을 먹었는지 묻지 말라. 입이 부끄러워질 테니까)’ 등의 속담은 그들이 열악한 음식으로 연명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Eho ju n'uwo'la(배가 채워지면 음모가 사라진다)’는 다양한 작물이 재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음식의 질이 아닌 가용성과 접근성을 걱정했음을 시사한다.]

농장주들은 주식 작물 재배에 의지했고, 시골의 소작농들도 심지어 카사바 생산을 줄이면서도 주식의 생산량을 증대시키는 다양한 전략을 도입했다. 이러한 전략을 통해 어려움을 성공적으로 헤쳐 나갔는지 여부에 따라 그들의 계층이 결정되었다. 농장주들은 주식 작물 재배에 의존하면서도, 생산을 증대시키는 많은 전략을 도입했다. 이러한 전략을 성공적으로 협상하는 농장주의 능력은 그 자신와 아내(들)이 어떤 계층에 속하게 될지를 좌우했다. 레자, 에데 오발라(Ede Oballa), 오잘라(Ozalla), 에크웨그베(Ekwegbe)와 같은 은수카(Nsukka) 주변 지역이 택한 첫 번째 전략은, 수출 작물 생산을 강조하는 규제가 도입되기 이전에 대규모로 참마 농사를 지었던 주요 현지 농장주들과 협상을 하는 것이었다. 참마 종자를 보유하지 못한 열정적이고 활기찬 농장주들은 참마 종자를 충분히 보유한 농장주들과 협상을 했다. 그들로부터 참마 종자를 구매하거나, 또는 그들의 소작인이 되어 참마 종자를 재배하기 위해서였다. 후자의 경우, 소작인은 헛간에 쌓여 있는 참마 10줄을 받아와 재배했다. 그리고 수확 후에는 처음에 받은 것과 동일한 길이로 12줄을 농장주에게 주고, 나머지는 자신이 가졌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레자 지역 우무아크포 우웰루(Umuakpo Uwelu) 마을의 추크우마 느우조르(Chukwuma Nwozor)와 같은 농장주들은 오메루에구(Omeruegu, 유명한 참마 농부)라는 칭호를 얻었다. 소작농들은 생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협동 조합을 구성하여, 순번제로 노동력을 교환했다. 이러한 관습을 이그바 오후(Igba Ohwu)라고 불렀다.

두 번째 전략은 농장일을 하기 위해 고용된 일꾼, 특히 참마 밭에서 흙더미(mound)를 만드는 사람들의 일당을 높여주는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러한 일꾼들은 보통 크기의 참마 흙더미 100개를 만드는 댓가로 6 펜스를 받았다. 그러나 오이보(Oyibo, 유럽)와 이틸라(Itila, 히틀러) 간의 전쟁이 3년차에 접어들 무렵 이들의 일당은 8펜스로 높아졌다. 임금이 인상되자 신체 건강한 많은 남성들이 임금 노동에 종사하게 되었고, 그 결과 농장주들이 재배하는 농지가 증가했다. 또한 농장주들이 혼작을 도입함에 따라 주식 식량이 재배되었다. 모든 참마 농장에는 흙더미 옆쪽으로 간격을 두고 옥수수, 카사바, 심지어 멜론이 심어졌다. 전쟁 이전에는 은수카의 이그보 지역사회에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이러한 관행은 결국 지금까지도 존속하게 되었다. 아체베(Achebe)가 분석한 바와 같이, 혼작은 대부분의 이그보 지역사회에서 지배적인 관행이었다. 그러나 레자에서 그러한 관행은 제2 차 세계대전 법에 대한 저항의 유산 중 하나로 나타났다. 그 이전에는 카사바를 별개로 재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공동체구성원들이 카사바를 여성들의 작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여성들에게 주는 일종의 보상으로, 간작된 모든 작물은 여성의 몫으로 돌아갔다. 여성들이 자신의 작물을 재배하는 데 쏟아야 할 시간을 남편과 그 친척들의 참마 재배에 소비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카사바가 주식 작물이었는데도 전쟁 기간에는 생산량이 줄었음을 의미했다. 이는 명백한 저항의 징후이다. 카사바에서 나온 전분이 군대의 유니폼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데 사용됨에 따라,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에서 카사바의 수요가 높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시기에 영국인들을 괴롭히기 위해 카사바 생산에 저항했던 경험을 속담을 통해 이야기한다. ‘사냥꾼이 가젤을 쏘는 것은 가젤을 보았기 때문이다.’ 즉 애초에 영국이 요구하는 카사바 생산량을 채우지 않으면, 영국이 통제할 대상이 없어지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이들의 저항은 C. J. 코리에(C.J. Korieh)가 분석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그보 농업의 성격 변화와 20세기 초부터 나타난 대대적인 변화가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 부분은, 이그보 남성성의 상징인 참마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카사바가 가장 중요한 생계 작물로서 중요성이 커졌다는 사실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욕구로 인해 농장 일꾼들 사이에 경쟁이 발생하면서, 농장주들은 일꾼들이 더 많은 참마 흙더미를 만들기 위해 작업의 질에는 신경을 덜 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따라서 농장주들은 세 번째 전술을 채택했다. 일꾼들에게 참마 종자로 임금을 지급함으로써, 스스로 참마를 재배하도록 독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양질의 작업을 전제조건으로 했다. 작업의 질을 판단하는 기준은 경작지의 높이와 깊이, 흙을 풀로 덮은 정도, 흙더미에 참마 파종을 할 때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작은 나무의 뿌리와 그루터기를 제거하는 것 등이었다. 일꾼들은 보통 크기의 참마 흙더미 100 개당 40개의 참마 종자를 받아갔다. 이때 지급되는 종자 참마의 크기는 그들이 심은 것과 동일했다. 이는 나름의 문제를 초래했다. 일부 일꾼들이 평균 이하라고 생각되는 종자 참마를 재배하는 농장, 또는 자신이 속한 계층에 걸맞지 않은 참마 종을 재배하는 농장에서는 일하지 않겠다고 나선 것이다. 레자 지역에서 아발라(Abala)라고 불리는 물 참마(dioscorea alata)가 대표적인 예이다. 레자 지역 사람들은 ‘Abala gba kogbale nólako n'ishi oba(물 참마는 제 아무리 커도 창고 가장자리에 놓아야 한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아발라를 무시했다.

일꾼들에게 작업 거부에 직면한 농장주들은 일꾼들을 다시 끌어오기 위해 또 다른 묘책을 고안해야 했다. 이번에는 매우 중요한 문 화적 상징, 즉 우잠(Ujam)이라는 전통 가장 무도회 의상을 일꾼의 ‘옷’ 에 접목하는 전술을 도입했다. 우잠은 에야 에불레(Eya Ebule)를 특징 으로 하는데, 그것은 이 지역에 서식하는 난쟁이 숫양(에불레, ebule)의 목 부분에 드리워진 매우 긴 털(에야, eya)로 만들어진다. 에야 에불레는 숫양을 도살하고 목 부분만 가죽을 벗겨내어, 가죽에 붙은 털로 몸을 치장하는 것이다. 농장주들은 일꾼들이 돈이 아닌 명예를 놓고 경쟁하도록 경연 대회를 개최한다. 이 대회에서 가장 많은 참마를 생산해 낸 일꾼에게 100 더미당 40개의 종자 참마를 제공한 후, 에야 에불레를 트로피로 주어 입도록 했다. 대회가 열리는 날, 농부는 목 주위에 아주 긴 털을 가진 매우 건강한 난쟁이 숫양(이 지역에서는 ’목 주위에 긴 털을 가진 늙은 숫양(Nkpokoro ebule eya juru olu)’이라고 함)을 준비해 참마 창고 문에 묶어 놓는다. 대회 참가자들은 아침 일찍 그곳에 와 숫양을 보고 나름의 평가를 내린다. 숫양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는지 아닌지는 그들이 해당 농장주의 땅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지 여부로 드러난다.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은 숫양이 적절하다고 받아들인 것이고, 그냥 돌아가면 숫양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적절한 수의 참석자가 모였다고 생각되면, 농장주는 참가자들을 위해 세 종류의 여흥을 제공했다. (참석자 수는 많아야 했다. 이 지역 사람들은 ‘Oru igwee di oyii(많은 사람들이 다같이 하는 일은 괜찮다)’라는 말을 항상 하기 때문이다. 이는 '빛은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만든 작품(light is the work where many share the toil)’이라는 호머(Homer)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먼저, 농장주는 일꾼들이 대회 시작을 위해 농장으로 출발하기 전에 구운 참마에 신선한 야자유, 후추, 소금으로 만든 소스를 곁들여 제공했다. 아주 부유하고 인심 좋은 농장주들은 구운 참마와 야자유 소스와 함께 현지어로 오벨레 아그바다(Obele Agbada)라고 불리는 야자 와인이 담긴 큰 통을 함께 내왔다. 이 야자 와인은 반드시 쓰러진 기름야자 나무(엑스포, expo)가 아닌 서 있는 기름야자 나무(느쿠 엘루, nkwu elu)에서 채취한 것이어야 했다. 8~10 리터의 야자 와인은 일꾼들이 술에 취하지 않고 나누어 마시기에 충분했다. 일부 농부들은 대회 참가자들이 힘을 내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프로 플루트 연주자들을 고용하여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다.[사진 1]

농장에 도착하면 참가자들이 작업을 하면서 볼 수 있도록 ‘트로피 전달자’(숫양)을 농장 반대편에 묶어 놓는다. 지금 그들은 경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최고의 일꾼은 작업한 라인 별 참마 흙더미의 수에 전체 라인의 수를 곱한 값, 그리고 흙더미가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를 기준으로 판단된다. 작업 중에 일꾼들은 간식을 제공받는데, 선호하는 간식 메뉴는 삶은 참마와 삶아서 발효시킨 이네네 아크파카(inene akpaka, 아프리카 유채과 식물의 종자)로 만든 지역 고유의 소스이다. 간식을 먹은 후에는 대회의 마지막 단계가 시작된다. 참가자들이 대회가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경기 중 언제라도 속도가 느린 참가자가 발견되면, 그 옆 줄에서 작업하는 경쟁자가 그를 추월할 수 있다. 강력한 일꾼들은 게으른 참가자들을 압박하여 대회를 포기하게 만든다. [사진 2, 3]

속도가 느린 참가자가 추월 당하면, 농장주나 조수가 다가와 추월 당한 일꾼이 작업한 부분에 표시를 한다. 게으른 참가자와 정력적인 참가자가 만든 흙더미를 서로 구별하기 위해서다. 참가자들이 힘을 쓰는 동안 플루트 연주자는 그들 하나하나를 찬미하는 곡을 연주하며, 동시에 약한 참가자가 힘을 내서 일하도록 북돋운다. 예를 들어 속도가 느린 참가자에게는 ‘남자들이 다른 남자들을 임신시키네’라는 곡을 연주하고, 정력적인 참가자에게는 그를 ‘다른 동물들과 마음대로 성관계를 하는 수컷‘을 의미하는 ‘오케 네니 아누(Oke n’enyi anu)’로 묘사하는 곡을 연주하며 능력을 찬양한다. 다른 참가자들을 ‘괭이를 든 여자들’이라고 부르면서 정력적인 참가자의 남성성을 찬양하는 것이다. 대회의 진행 속도가 느려진다고 느껴질때는 ‘Nsheshe munyi néyo mkpume(떨어지는 물방울이 결국 돌을 마모시킨다)’는 노래를 연주해 모두를 격려한다.

늦은 오후(4시경)에 대회가 끝나면 참가자들은 농장에서 돌아와, 농장주가 제공하는 또 한 차례의 여흥에 참가한다. 이번에는 참마 절편과 큰 고기 덩어리가 제공되며, 말린 고기면 더욱 좋다. 농부의 아내(들)도 경쟁을 했다. 그들이 만든 수프는 일꾼들이 또다른 대회에 참가하도록 설득하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농부의 아내(들)는 아주 걸죽한 오크라(okra, 학명: 아벨모스커스 엑설런티스(abelmoscus exulentus)) 또는 에구시(egusi, 수박, 학명: 시트럴러스 래니터스(citrullus lanatus)) 수프를 만드는데, 이는 각각 오호이(ohoyi) 또는 이네네 느와쿠(inene nwa'ku)라고 불린다. 수프의 질을 평가하기 위해 먼저 수프 위에 커다란 참마 절편을 얹는다. 참마 절편이 가라 앉으면 수프가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참가자들이 수프에 만족하지 않으면 그들 몫의 작물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알고있는 여성들은 말린 생선을 많이 넣어서 수프를 만든다. 참가자들은 수프가 마음에 들면 그것을 만든 여성들에게 ‘오데케(Odeke)에 다녀왔느냐’고 물어 칭찬의 뜻을 표한다. 오데케는 나이지리아에서 큰 수산 시장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여기에 사용되는 소스, 특히 에구시는 영양학적으로 가치가 높다. 이는 에구시가 고지방 식품이기는 하지만 주로 두뇌 기능, 피부, 손톱, 머리카락에 필요한 필수 지방산을 제공하는 유익한 지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또한 농장주는 일꾼들이 원하는 만큼 취할 때까지 야자 와인을 제공했다[사진 4].

여흥이 계속되는 동안 농장주는 사람을 시켜 숫양을 도살하고, 정해진 방식으로 가죽을 벗기도록 한다. 그리고 숫양의 고기를 요리하여 참가자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러나 이 행사의 진정한 클라이맥스는 에야 에불레를 승자의 왼팔에 겨드랑이에서 8인치 아래 지점에 묶어주는 순간이다. [사진 5, 6]

이는 모든 일꾼에게 숫양의 고기를 나누어 준 이후에 행해진다. 트로피와 같은 에야 에불레를 왼쪽 팔에 묶은 승자는 오른손으로 괭이를 들고 농부의 소유지를 돌며 춤을 추어, 대회에서 그가 얼마나 민첩했는지를 뽐낸다.

이 경우에 참가자의 힘든 노동에 비해 보상이 충분하지 않아 보일 수도 있지만, 문화적 관점에서 이러한 보상은 매우 중요하다. 승리의 트로피가 몸 치장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특히 이그보족에게 예술은 개인이 자의식을 투사하는 수단이며, 특히 개인의 몸 치장은 더욱 그러하다. 이그보족의 예술적 관심은 종교 의식과 사회생활에 큰 영향을 주어, 실용성과 관념성을 결합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한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예술은 모든 인간의 삶, 삶의 화려함과 영적 본질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술은 삶을 장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삶 자체를 유지하는 방법’이라는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더욱이, 대회 참가자들과 농장주들이 속한 공동체에서 에야 에불레는 가장 중요한 가면무도회의 의전담당관이 착용하는 장식이다. 따라서 트로피로 받은 에야 에불레를 착용하는 것은 그가 농업 분야의 제일가는 일꾼이자, 국내 식량 안보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사람임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사실은 이 상징을 착용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따라 잡히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게 되므로, 스스로에게 (청렴성과 신뢰성의) 부담을 부과하기도 하다는 점이다. 승자는 새로운 대회에 초청될 때마다 이러한 상징을 착용하여, 지금까지 자신이 승리한 대회의 수를 과시한다. 다른 참가자들을 기죽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청렴성과 신뢰성이야말로 성공적인 인재들과 사업의 발전을 함께 묶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는 은나디(Nnadi)의 견해와 일치한다.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가치 체계가 존재한다. 가치는 동기부여와 감정의 심리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개인들에게 활력을 부여하고 목표 달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추동하는 본질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은 경제가 점점 화폐 중심으로 변화하고 도시화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공무원들이 고향에 돈을 갖고 돌아와, 농장주들에게 현대식 주택 건설 등 물리적 인프라 측면에서 구미가 당기는 도전과제를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략 하에서, 그러한 대회를 조직할 수 있는 부유한 농장주들은 많은 참마 창고를 채우고, 사회에 식량을 공급하며, 칭호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식량 부족 해결을 위한 농장주들의 여정이 오늘날까지 여전히 건재한 유산을 남긴 부분은, 바로 칭호를 획득하는 것(title-taking)과 관련된 부분이다. 농장주들은 특히 1944년부터 생산량 확대를 위한 다섯 번째 주요 전략을 채택했는데, 이는 저명한 농부들에게 걸맞은 칭호를 획득하는 것을 중심으로 한 전략이었다. 작물을 재배할 농지가 부족했던 일부 농장주들은 레자 지역을 벗어나 멀리 떨어진 다른 마을에 농장을 세웠다. 이러한 관습에따라 아다니(Adani) 지역에서 농업이 발전하게 되었다. 아다니는 에누구(Enugu) 주에서 우조 우와니(Uzo Uwani) 지방 정부가 통치하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이 지역은 오늘날 우구 레자(Ugwu Lejja)라고 불린다. 심지어 일부 농장주들은 역시 아다니에 있는 이이 오웨레(Iyi Owerre), 이요케 니가(Iyoke N'igaa)에 농장을 세웠다. 충분한 토지를 가진 농장주들은 마을과 지역사회 외부에서 땅을 임대한 농장주들을 ‘Okwomeru nri onyeozo enwghi akpakpa ohu(다른 사람의 음식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앉을 엉덩이가 없다)’는 말로 조롱했다.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를 채우고 자신의 농장 사업을 존속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것을 지적하는 표현이었다.

후자에 속하는 농장주들은 농업과 식량안보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하더라도, 고향 마을의 농지 또는 개인 토지에 경작을 한 농장주들과 같은 수준에 놓일 수 없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이들이 먼 곳에서 경작을 하기 위해 때때로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따라서 일년 내내 마을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제공해야 한다는 공동체 남자들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유형의 농장주들이 받는 존중의 정도가 달랐으므로, 농장주들에게 부여되는 호칭도 두가지로 나뉘었다. 바로 오부 눌로(Obu n'ulo, 마을 내에서 농사를 짓고 거주하는 농장주)와 오부 나마(Obu n'ama, 일시적으로라도 마을 외부에서 농사를 짓고 거주하는 농장주)이다.

저명한 농장주로서의 업적에 걸맞은 칭호를 획득하고자 할 때, 마을 내에 농장을 보유한 농부들과 마을 또는 개인 토지 외부에 농장을 보유한 농부들이 치르는 의식은 서로 차이가 있었다. 마을 내에서 농사를 짓는 농장주들은 원칙적으로 마을 조상의 사원에 수탉을 한 마리를 가져오고, 대지의 여신 사원에 암탉 한 마리와 세 알의 콜라 너트(kola nut) 씨앗을 가져와야 했다. 마을의 최고 연장자(촌장) 또는 그의 대리인이 해당 농장주와 함께 사원으로 간다. 농장주(칭호 지망자)를 대신하여 제물을 바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촌장이 콜라 너트를 하나씩 깨고, 지망자를 대신하여 기도를 하며, 관습법에 따라 닭을 성별에 따라 각기 다른 장소에서 도살한다. 남은 콜라 너트는 촌장이 자신의 몫으로 가져가고, 깨진 콜라 너트는 지망자 각각에게 한 조각씩 주었다. 마을 밖에서 농사를 짓는 농장주의 경우, 지망자는 네 알의 콜라 너트 씨앗, 수탉 한 마리, 그의 농장에서 가져 온 흙, 암탉 두 마리를 제공했다. 대지의 여신의 사원에서 수행되는 의식을 제외하고는 모든 의식이 앞과 동일했다. 이 경우에는 콜라 너트 씨앗 두 개를 깨고 암탉 두 마리가 희생되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농장에서 가져온 흙을 받아 고향 마을의 대지의 여신 사원의 바닥에 붓고, 여신에게 다른 곳에서 가져온 물건을 칭호 획득 의식에 쓰도록 허가해 달라고 요청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의식이 추구하는 바는 농장주의 고향 마을의 여신과 농장이 위치한 마을의 여신이 동맹을 맺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는 고향 마을의 여신은 칭호를 받지 않은 상태로 타지에서 재배된 것을 사용하는 것을 눈감아 주고, 농장 마을의 여신은 칭호를 획득하는 바탕이 된 부를 창출해 준 것이 해당 마을의 땅이라는 점을 눈감아 주도록 함으로써 둘 사이에 다툼을 방지하려는것이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디아스포라(diaspora)’ 농장주들은 이전과는 달리, 그들에게서 돈을 빌린 사람들에게 담보로 노동력 대신 땅을 요구했다. 이들은 심지어 매우 어려운 조건과 촉박한 대출 상환 기간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건을 어기면 채권자인 농장주에게 담보를 뺏기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레자 지역의 우무오다-에제(Umuoda-Eze) 마을에서 오구아니 아그하루(Ugwuanyi Agharu) 가문이 소유했던 땅의 대부분을 직계 혈통 밖의 사람들, 그리고 심지어는 다른 마을의 사람들이 소유하게 된 것이다. 우그워케자 오니이시(Ugwokeja Onyishi)와 같은 디아스포라 농장주들은(비록 칭호는 받지 못했지만) 이러한 방법으로 우구아니 아그하루로부터 땅을 확보했다. 이들은 고향 마을 내에서 아그하루의 땅에 접해있는 토지를 더 많이 확보하려는 했고, 이로 인해 레자 주민들 사이에서 격언이 생겨났다. ‘Ekpere nwa nna n’ekperu nwa nna bu ya diri ndu, obughi ya karu nya(친족은 그의 친족이 살아있기를 기도하지 자신을 더 위대하게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레자 주민들의 식량 안보에 도움이 된 이러한 오랜 유산은 나이지리아의 식민지 역사에 관해 깊이 뿌리 박힌 견해 중 하나를 강력하게 부정한다. 특히 몰로니 대위(Captain Moloney) 등이 제시한 관점이 이에 속한다. 몰로니 대위는 한 세기 동안 백인 무역업자들의 약탈을 겪은 나이지리아는 “식민지 통치자들이 당장 내일 모두 떠난다 해도 그들에 대한 감사의 기념탑을 남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결론

도전과제와 그에 대한 대응을 조명한 본 연구는 ‘최고의 병사는 고난의 고지에서 만들어졌다’는 격언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준다. 이는 제 2차 세계대전 중 나이지리아의 식민지 법에 대한 은수카 레자 지역 소작농들의 대응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에 따르면, “역사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결정을 내리는 언어를 사용할 때 가장 잘 이해되는 담론이다.” 홉스봄의 격언은 전면적 일반화를 거부하는 텍스트성(textuality)과 맥락에 중심을 두고 있다. 본 연구는 은수카 레자 지역의 소작농들과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이지리아에 도입된 식민지 법에 대한 그들의 대응을 텍스트로 삼고, 특정한 법이 농부들의 경제적 이득 추구에 어떻게 지장을 주는지를 살펴보는 것을 맥락으로 한다. 이를 통해, 이그보 농부들이 보여준 행동이 ‘Eji ngaga agbara oke efi oso(자부심은 황소로부터 도망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이그보 격언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을 밝힌다. 우월한 권력(식민 통치 당국을 의미하며, 현지에서는 ‘황소’라고 표현함)으로 인해 주식 작물의 부족에 직면한 레자 소작농들은 전통적 지혜를 바탕으로 실행 가능한 전략을 채택하여, 연구 대상 기간동안 식량 안보 위협을 피할 수 있었다. 전면적인 대항보다는 시민의 불복종과 공동체의 정서에 호소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그들의 사회 및 종교 생활에 반영되었으며, 노동력을 동원하는 농부들의 독창성을 시험했고, 참마 농부들의 계층화를 도입했으며, 경쟁을 유발했고, 농촌 농부들의 독창성을 자극하여 채무자로부터 더 많은 토지를 확보하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게 했다. 이 전략은 또한 사람들이 농업에 대한 자부심을 갖도록 했다. 에야 에불레를 착용하려는 열망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농사일을 하는 사람들, 특히 참마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는 자세와 탁월함을 존중했다. 그러나 경쟁의 정신을 증진하고 식량 안보를 보장하는 이 새로운 전략은 과도한 화폐 중심 경제와 도시화에 무너져버렸다. 이제 더 이상 참마 창고나 에야 에불레가 성취를 평가하는 기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농업 관습 혁신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시기에는 여성에 대한 권한 부여가 실현되었다. 이 기간 이전에 여성들은 남편의 참마 농장에서 잡초를 뽑는 일을 떠맡았지만, 수확한 참마에 대한 소유권과 사용권은 별로 갖지 못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참마 농장에서 간작된 모든 작물은 여성들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여성들도 자신의 몫을 통해 창출한 수익을 바탕으로 오메루보(Omerubo), 즉 전문 (수프) 요리사라는 나름의 칭호를 만들었다. 더 많은 칭호를 얻기 위해 남성들이 경쟁했듯이,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이러한 칭호는 레자에서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보다 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간작’이라는 아이디어는 식량 안보를 단기 및 장기적으로 보장하는 확실한 방법이었다. 콩과 식물인 검은 콩 등의 작물은 대기 중의 질소를 토양에 더해주는 이점이 있었고, 또한 토양의 품질에 대해 광범위한 중요한 이점을 제공해 주었다. I.I. 이베아우치(I.I. Ibeawuchi) 등은 다음과 같이 질소의 중요성에 주목했다.

“농업 생산 시스템에서 적절한 수준의 질소(N)는 적절한 식물 생장에 필수적이다. 엽록소, 효소에 유용하며, 식물 조직과 세포 기관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아미노산과 단백질에 도움이 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많은 열대 농업 시스템에서 질소는 물에 이어 두번째로 중요한 요소이며, 일반적으로 토양 표면 무기질의 질소 함량은 약 0.02~0.5 %이다.”

이처럼 농부들의 저항은 농부들 사이에서 경쟁과 계급 구분을 촉발시켰을 뿐 아니라, 농업의 혁신을 이끌어내 토양 비옥도를 향상시켰다.

나이지리아에서는 농민의 약 95%가 소작농이며, 이들은 인구 대부분의 식량 요구를 충족하고 있다. 반면에 나이지리아 농민의 5%는 기업형 및 정부가 지원하는 대규모 농장에 고용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바로 이 5%가 지속적으로 나이지리아 정부의 농업 진흥 사업의 우선순위 수혜자가 되고 있다. 또한 정부의 농업 진흥 프로그램은 자본집약적 기계화 농업, 환금 작물 생산, 식량 작물 생산을 희생시키는 대규모 농업 등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을 선호한다. 이는 나이지리아인들이 역사로부터 교훈을 배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식민 시대에 나이지리아인들은 식량 작물 생산 감소에 저항하는 매우 중요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정부가 시민들의 기아를 방지할 수 있도록, 국내 소비를 위한 식량작물 생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논리적인 수순이다. 그러나 나이지리아인들이 영국을 비난하는 원인이 되었던 바로 그 일을 식민시대 이후의 자국 통치자들이 여전히, 그리고 심지어 더욱 대대적으로 자행하고 있다. 모든 농업 프로그램이 소작농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지 않는 한, 나이지리아의 식량 안보는 요원한 꿈으로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