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사자놀음 : 북한 실향민 공동체 무형문화유산의 전승과 변화

Writer : Eun Sok Bae and Yoon Ok Park
Year : 2018


개요

이 논문은 속초 청호동 아바이 마을에서 재창조된 민속놀이인 사자 놀음을 통해 무형문화유산의 전승이 공동체의 정체성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탐색한다. 이 놀음은 마을의 고향, 북청의 추억, 북한과의 전쟁, 한국전쟁, 국토 분단 및 실향을 포용한다. 디아스포라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북청의 속초 사람’이라고 정체화한다. 이것은 이 놀음의 명칭은 속초 북청 사자 놀음에서 속초 사자 놀음으로 바꾸는 데에서 나타난다. 이 변화는 무형문화유산의 주요 요인들, 즉 자기 인식과 관련 공동체 및 집단의 역사적 및 사회적 변화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지속적인 재창조, 유산의 정체성에 대한 유산의 연관성, 문화유산의 진실성, 무형문화유산과 인권의 상호 관계 등을 포함한다. 사자놀음은 살아있는 놀이이자 남한과 북한 사이의 중요한 연결 고리이다.


소개: 무형문화유산에 대한 논의

이 논문의 목적은 무형문화유산으로서의 사자놀음의 원형과 보존, 및 변화의 측면을 조사하고 무형유산과 문화적 정체성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데 있다. 사자놀음은 사자가면을 쓰고 하는 민속극이나 무용극으로, 속초에서 전쟁과 민족분단의 고통을 겪은 실향민 공동체에 의해 살아났다. 먼저 함경남도 북청지역(현재는 북한)에서 개발된 사자 놀음의 역사적 맥락을 광범위한 문헌연구를 통해 살펴 볼 것이다.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접근방식을 취하여 축제를 포함한 지역사회 활동을 통해 무형문화유산의 전달 방식을 관찰하고 속초에 있는 아바이 마을의 사람들이 사자놀음을 기억하는 방식을 연구한다. 그들의 집합기억과 공동체 의식은 개인적인 인터뷰와 접촉을 통해 수집되고 분석 되었다.

무형문화유산은 유형문화유산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무시되어 왔다. 1972년 세계유산협약을 발표했을 때도 유네스코는 이집트의 피라미드,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 페루의 마추피추와 같은 건축유적지 등 유형문화유산에 주로 초점을 둔 조치였다.

31년 후 2003년 무형문화유산 보호 협약이 마침내 채택되었다. 이 협약에 따르면, 무형문화유산이란 공동체, 집단 및 경우에 따라 개인이 인정하는 관습, 표현, 지식, 기술 및 그와 관련된 도구, 물건, 공예품 및 문화공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형문화유산은 일상생활에서 구두로 실행되고 전달되는 경향이 있다.(제2.1조) (a) 구전과 전통의 표현, (b) 공연예술, (c) 사회적 관행과 의례, 축제 (d) 지식과 관행 (e) 전통기술이다.(제2.2조) 즉, 이야기, 가족행사, 연설과 노래, 음식, 기념일 및 민간요법이 포함된다. 이러한 일상적인 관습은 궁극적으로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강력한 기반이 되는 관련 집단과 지역 사회에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을 형성한다. 무형문화유산은 문화다양성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문화의 세계화는 전세계적으로 급속하게 퍼지고 도시화로 인해 공동체 의식은 떨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형문화유산은 실제로 관행의 활성화보다는 원형의 보전에 중점을 두는 ‘보호’에 취약할 수 있다. 따라서 산업화, 서구화 및 전쟁으로 위협받고 있는 아프리카, 남미 및 아시아 지역국가들이 협약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무형문화유산을 보호하는 것이다. 특히 공식 및 비공식 교육뿐만 아니라 그러한 유산의 다양한 측면에서의 활성화(제2.3조)를 통해 달성될 수 있다. 따라서 과거와 마찬가지로 무형문화유산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며, 무형문화유산을 살아있게 한다. 무형문화유산의 초점은 문서화, 평가 및 선정에서부터 진행 중인 지식의 전달 및 보호를 위한 조치로 이동한다(Boylan: 2012). 이와 관련하여 관련 공동체 및 집단의 역할은 유산 자체보다는 과정과 환경을 강조한다. 무형문화유산의 보호는 그것을 순수한 형태나 원형으로 고치거나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실천하고 수행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한국은 무형유산 보호를 위한 오랜 역사를 가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이며, 무형문화유산의 적극적인 보호와 보전을 위한 제도와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중요무형문화재’로 불리는 ‘인간문화재’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 시기는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 및 서구화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급속도로 변화하여 전통예술의 정신, 전통예술에 입각한 관습과 같은 무형문화유산이 급속히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음을 목격했다. 이 ‘무형문화재’ 제도의 도입은 전통문화가 근대성에 의해 휩쓸리게 될 것이라는 우려로 인하여, 지정을 통해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국 문화유산의 측면을 보존, 육성 및 전승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한국의 ‘무형문화재’ 지정은 1962년 문화유산보호법의 제정을 통해 이행되었다. 일반적으로 그 지정은 주로 무형문화표현 및 관행의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역사적, 예술적 또는 학문적 가치에 기반하며, 음악, 연극, 무용, 민속놀이, 종교의례, 무술, 수공예품 및 요리와 같이 다양하다. 중요무형문화재의 기술이나 예술 능력을 원래의 상태로 습득하여 보존하고 재현할 수 있는 사람 또는 집단은 ‘중요무형문화유산’기술자 및 예술 능력 보유자 또는 집단으로 지정된다. ‘인간문화재(Living National Treasure)’로 지정되면 관련인물이나 단체는 정부의 지원을 받을 자격이 생긴다. 그 대신 공연과 행사를 통해 해당 기술을 대중에게 알리고 학생들을 가르쳐 문화재를 차세대로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다.

노래, 음악, 무용, 드라마, 요리, 공예 및 축제와 같은 무형문화는 기록될 수 있지만 물리적인 형태로 만져지거나 저장될 수 없는 형태를 취하므로 인간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다. 그것들은 문화와 관련된 일에서 문화요소의 운반자, 전달자이자 대리인이다. 따라서 공연자들은 Kirshenblatt-Gimblett이 말했듯 전통의 소지자이자 인간문화재이다(Kilshenblatt-Gimblett 2004: 58). 그들은 유네스코가 말했듯 인간문화재라고 한다. 사람들은 세대를 통해 변해가지만 문화는 계속 존재한다. 그러나 세계화와 이주와 같은 압력 때문에 문화와 인간의 관계는 변화한다. 이러한 압력은 사람들의 문화와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 문화생산과 재생산의 기본 조건을 변화시킨다. 변화는 문화에 내재되어 있으며 보전, 보존, 보호 및 특정 문화적 관행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는 관습을 고정시키고 본질적으로 문화의 성격을 다루는 과정에서 포착된다(Kirshenblatt-Gimblett 2004:58-59).

손실되기 쉬운 무형문화유산은 사회적·문화적 환경의 변화에 끊임없이 재현되어 문화 다양성을 풍요롭게 하는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이민자나 실향민의 경우 무형문화유산의 표현은 지역에 관계없이 자신의 유산으로 여러 지역사회 또는 그룹에 재생산 되어 전달될 수 있다. 그들은 장소, 기억 및 정체성과 연결된 지식과 형태로 그것을 재창조 한다. 무형문화유산은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은 마을에서 종종 시작하기 때문에, 마을의 이름은 함안 화천 농악, 강릉단오절, 제주해녀문화와 같은 문화유산의 이름으로 자주 사용된다. 유네스코 협약(제2.1조)은 무형문화유산은 전이과정, 환경, 자연과의 상호작용 및 역사에서 지속적인 재창조와 공동체와 집단을 통한 정체성과 연속성을 특징으로 한다.

최근까지 박물관을 비롯한 유산 관련 기관 및 학자들은 유형문화유산의 보존 정책에 익숙했다. 2004년 서울애서 개최된 박물관 및 무형유산에 관한 국제회의(ICOM)에서 다양한 분야의 박물관 전문가들이 그들의 관습에서 문화적 상대주의를 진지하게 추구하기 시작한 시금석이 되었다(Yim 2004). UNESCO와 ICOM이 보여주는 관심과 함께 무형문화유산에 대한 연구가 증가하였고 연구는 주로 박물관학의 관점에서 수행되었다. 유산을 보전 및 보존하기 위해 박물관에서 설립되고 개발된 접근법과 관행을 적용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나 무형문화유산의 보존 및 전승방안은 유형문화유산의 보존 빛 전승방안과 달라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이제 무형문화 유산인 사자놀음의 요소를 탐구해 지속적인 사회적 변화 속에서 살아남은 방법을 깊이있게 살펴볼 것이다.


속초시 청호동의 ‘아바이 마을’과 사람들의 정체성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용어는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되었는데, 흩어진 인구를 의미하거나 조상의 고향에서 사람들이 멀리 떨어져 있음을 의미한다고 Merriam-Webster사전에서 지적한다. 오늘날, 이 용어의 사용은 본질적으로 세상에 어느 정도 분산되어 있는 모든 명목상의 인구범주(Brubaker 2005: 3)를 참조하도록 확장되었다. 디아스포라의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집단이 고향의 ‘신화’ 또는 집합기억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조상의 고향을 그들의 진정한 고향으로 여기며, 그들은 결국 그 곳으로 돌아갈 것이고, 고향의 복구 또는 유지에 전념하고 있으며, 개인적으로 또는 대리적으로 고향과 관계를 맺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Safran 1991: 83-4).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1910-45년), 한국전쟁(1950-3년) 동안 실향민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남북한 분단과 전쟁으로 인하여 사상자, 사망자 그리고 이산가족 등 큰 비극이 발생했다. 전쟁이 발생한지 약 6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흩어져 있다.

속초는 한국 동해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구는 8만명이다. 한국전쟁 중에 남한으로 탈출한 실향민이 이 마을 인구의 70%를 차지한다. 이 디아스포라의 대 부분의 사람들은 함경도 출신이다. 청호동에 있는 아바이 마을은 1세대 피난민 공동체이다. 그들은 짧은 기간 동안 머무르려고 했지만 분단의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거기에 정착해야 했다. 그들은 이 마을을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갈 발판으로 생각하고 뿌리를 내리지 않았다. 그들은 1~2, 최대 3개월 내에 집으로 돌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머물렀다. 많은 사람들이 북에서 남으로 육로로 내려왔지만, 청호동에 정착한 사람들 대부분은 보트를 타고 피난을 왔다. 그들은 전쟁 후에 다시 집으로 항해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보트를 정박시킬 수 있는 곳이 임시거쳐를 마련하기에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람들은 청초호의 비어있는 모래언덕에 정착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마찰을 빚지 않으며 마을에 정착할 수 있었다. 북한에서 같은 지역에 살아있던 사람들이 모여 청호동에 ‘아바이 마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아바이 마을’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방언에서 아바이의 사전적 정의는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이다. 이 이름은 경상북도, 평안도 및 함경남도 등 각 지역에서 약간 다른 뉘앙스로 사용된다. 과거에는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 사람들이 대부분 이었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남성을 이른다고 말한다. 실향민들의 기억 속에서 함경남도는 매우 독특한 문화를 가진 지역이다. 지역 사람들은 강인하고 절약정신이 강하고 교육에 대한 존경심을 특징으로 한다. 북한과 분단하기 전에 북한 사람들은 함경북도 사람들을 함경도 아바이라고 불렀다. 청호동의 2세대와 3세대는 여전히 강한 소속감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마을에 속하는 감각은 지역의 친족관계에서 비론된다. 그러나 청호동의 경우에는 내면화된 경험을 바탕으로 마을 공동체에서 배운 것으로 보인다 (국립민속박물관 2014).

디아스포라의 경우, 무형유산으로서의 기억과 문화적 재생산은 정체성을 키우는 데에서 유형유산보다 중요하다. 그 기억은 그들이 음식을 잃어버리기 전에 즐기는 음식과 오락의 형태로 소생되는 경향이 있다. 속초 지역의 사람들은 좋아하는 음식으로 요리하고 고향에서 즐기던 오락을 재현하여 타지에서 생존을 위해 애쓰고 있다. 이것은 피난 생활에서 고통을 치유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지역사회와 소속감을 강화시켰다. 음식과 오락은 삶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이 논문은 속초에서 디아스포라에 의해 전승되고 보존되어 온 사자놀음에 초점을 맞춘다.


함경남도 무형문화 북청사자놀음

북청사자놀음은 함경남도 북청을 기반으로 한 한반도 동부 연안 지역의 전형적인 사자놀음이다. 11개 면과 3개의 읍으로 구성된 북청군의 각 마을에 있는 농민들이 행하는 전통 세시풍속 중 하나로, 정월대보름 밤에 공연되는 가면극이다.

이 놀이는 탈 없는 해를 보장하기 위해 사악한 귀신들을 물리치는 것이다. 이것은 지역 사회의 평화를 기원하며 마을의 모든 구석을 돌아다니는 놀이패가 수행하는 길놀이(거리에서 수행되는 축귀)로 시작된다. 퉁소(구멍 6개 대나무 피리) 소리가 들리면 모든 마을 주민들이 의식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사자춤을 줄기고 모닥불 주위에서 음식과 술을 잘긴다. 사자놀음은 같은날 북청에 있는 수십 개의 마을에서 공연되었다. 이것은 원래 전문가나 한 무리의 놀이패에 의해 수행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행위자로 참가하였음에 틀림없다.

사자놀음은 함경남도의 북청, 정평, 영흥, 흥원, 함경북도의 경성, 명청, 무산, 종선, 경원 등을 포함한 함경 지방 전역에서 주로 수행되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북청 사자놀음이었다. 북청 지역에서도 북청읍 사계리 11번지, 가면 학계, 양청면 영락계 등이 뛰어 났으며 죽룡리 사자는 북청읍에서 가장 유명하였다. 죽평리 등 작은 마을에서 이천 사자, 정촌 사자, 네놈 사자, 동문 우는 사자, 후평 사자, 분래 사자, 단포 사자와 같은 사자들을 만들었다. 모든 마을에서 마을에 모인 사자들 사이에서 경연이 열렸다. 1930년경부터 사자놀음은 서로 경쟁을 벌여 우승팀을 선정하였다. 청송면 토성리의 놀이패가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그 팀이 가장 유명하였다.

송석하(1904-1948)는 1936년 2월 7일 함경남도 북청군 청송면 토성리에서 현장 조사를 했다.[사진 1] 사자놀음 공연에서 그는 가면과 춤 의상을 입은 사자놀음 팀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송석하는 민속학을 한국에서 독립적인 분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학자이다. 1936년 2월 7일은 음력으로 1월 15일 정월대보름이다. 이 때 찍은 사진은 사자놀음이 풍요를 비는 정월대보름의 오래된 풍습임을 알 수 있다.

북청사자놀음 참가자들은 사자옷을 입은 사자와 퉁소, 장구, 북과 징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또한 양반과 그의 하인이 연극을 이끌고 이야기를 해설한다. 공연이 주로 대화에서 미묘한 풍자보다는 사자 춤에 주로 집중한다는 점에서 특징을 보인다.

북청의 수십 개 마을이 사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사자 가면의 출현 여부에 따라 사자 가면의 모양이 매우 달랐다. 1995년부터 1956년 여름 3차례에 걸쳐 북청 현장 조사를 실시한 김일철은 사자가면을 호랑이 또는 고양이 모양의 사자, 악마의 얼굴을 한 사자, 용으로 칠한 사자로 분류하였다.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에는 사자 가면 2개가 남아 있으며 194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2와 3]은 사자탈의 모양과그 차이를 보여준다.

[사진 2]에 표시된 사자 가면은 높이 20cm, 길이 57cm, 폭 51cm이다. 얼굴과 턱은 나무와 종이로 만들어졌고 나무 막대기와 철사로 연결되었다. 나무 막대기의 중앙에 빨간 종이 혀가 연결선에 매달려 있다. 전체적으로 붉은색으로 칠해졌으며 눈, 눈썹, 턱수염, 이빨은 다른 색으로 그려져 있다. 김일철의 보고서에서 묘사된 고양이 또는 호랑이 가면 중 하나라고 여겨진다. [사진 3]은 길이 50.2cm, 너비 62.5cm의 사자 가면이다. 세 개의 물결선을 그려 주름을 표현하고 서너개의 금박이 빨간색 이마에 수직 및 수평으로 붙어 있으며, 이빨은 직선으로 된 입 아래에 균등하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악마 사자 가면 중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개의 사자가면 모양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고려할 때 각 마을마다 아주 독특한 사자 가면을 사용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한국전쟁과 남북 간 분단을 거쳐 북청 사자놀음은 위기에 처했다. 사자놀음은 두 지역에서 매우 다르게 전달되었다. 첫째, 북한의 연극은 정치체제를 홍보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현재의 사자놀음은 1950년대 후반에 중단된 후 복원된 것으로 음력 설 다음날부터 정월대보름까지 각 마을의 공연자들간의 경쟁형태로 진행된다. 그 놀음은 국가문화유산으로 인정받으나 이데올로기 적이다. 부패, 무능함, 봉건시대 군주의 착취를 폭로하고 조롱하는 이야기와 함께 많은 가치들을 이야기 한다. 그 역동적인 이야기는 춤과 조롱거리, 농담을 통해 양반지배계급의 탐욕과 부도덕함을 면면히 드러낸다. 또한 풍년에 대한 국민의 큰 욕구가 북청사자놀음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입소문으로 전달된 것은 줄거리일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 본래의 이야기는 전달되지 않았으며, 북한의 사자놀음은 계층 구조를 반영하고 투쟁의식을 표현한다. 북한의 북청사자놀음은 정치 선전의 수단으로 변질되었으므로 원래의 형태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행복과 구성원 간 우정을 기원하는 세시풍속의 순수한 목적을 잃어버렸다.


북청사자놀음에서 속초북청사자놀음, 그리고 속초사자놀음

1) 실향민 1세대의 정체성과 지속성을 구현한 무형문화재, 속초 북청사자놀음

속초에 있는 북청사자놀음은 한국전쟁 후 함경남도에서 탈출한 피난민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속초에서는 1957년 정월대보름에 연행되었다.[사진 4] 그 때, 김수석과 퉁소 연주자인 김하균의 지도 하에 청호동 디아스포라의 모든 사람들은 남한에 살면서 놀이를 보았거나 실제로 공연한 적이 있었다. 1958년 공연자는 김수석이 사자 앞, 오동철이 사자 뒤였으며 이동욱이 양반, 양계배가 하인, 박공원이 사당패 춤꾼, 장남우가 의사, 김봉수가 불교 춤을, 김원삼이 신랑, 마윤덕은 곱사로, 김효환은 도깨비로, 이종호는 중국인으로 분장하였다. 또한 변무성과 박진환, 이재섭, 하해균, 김하련이 퉁소, 마방섭이 드럼을 이종준이 공, 진경을이 장구를 연주하였다.

전쟁 중 북측 주민의 절반(28만명 중 14만명)이 남한으로 피난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중 북청에서 300-400가구가 속초에 정착하였다. 북청에서 온 36명이 북청 지방청을 창설하였고 1959년 5월 북청지역인친목계를 조직했다. 이 계는 위원들의 우애와 협력을 다지기 위한 목적으로 형성되었다. 그 당시에는 북청사자놀음을 지휘한 회원들이 대부분 참석하였다. 계의 리더는 공연자 중 가장 오래된 구성원으로, 활동에서 중심역할을 한 김수석이었다. 계는 유흥과 친분을 유지하기 위한 조직, 장례식을 위한 조직으로 매월 20일 모여 놀이를 하거나 의례를 지냈다. 그들은 서울과 속초에 있는 다른 피난민들과 교류하면서 북청사자놀음의 원형을 복구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김수석은 1970년 사자의 앞을 맡은 사람으로서 전통문화기능 예능보유자 제 84호로 지정되었다. 이후에도 김수석은 속초에 살면서 사자놀음을 계속 홍보하였다. 1982년 속초사자놀음을 동우공업전문대학 학생들에게 축제공연을 위해 가르치기는 하였지만 1970년대부터 속초사자놀음은 점점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 전승은 1982년 9월에 끝났고, 가을맞이 새마을대축제 공연에서 최종 공연을 마쳤다.

1988년 정월대보름이 지나면서 약 10여명이 속초에서 복원된 북청사자놀음을 시도하였지만 본격적인 복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정월대보름 전날 퉁소를 연주하며 전승의지를 표명했다. 그 후 속초문화센터는 1991년부터 속초에서 실시된 사자놀음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하였다. 심층인터뷰와 설문조사를 통해 연구원은 북청지역민친목계의 규칙과 목록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으로 인하여 이 친목계의 회원들이 북청사자놀음의 실질적인 전승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으로 탈북한 직후 제조된 최초의 북청 사자탈을 김해균의 집에서 발견하고 조사기간 동안에 사진을 찍을 기회도 있었다. 속초 실향민들에게 복원과차세대로의 전승을 기원하는 북촌 사자놀음은 무엇인가? 디아스포라 1세대인 제재순이 쓴 속초라는 시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피난민이다.
진정으로 가시철조망을 제거하고 그 곳으로 걸어가기를 바라며
그 날이 올 것것을 진심으로 바라며
잠 들수 없는 북청 사자는 고향을 잃은 겨울에 울부짖는다.

시에서 표현한 바와 같이 북청 사지는 실향민들에게 감정적인 안식일 뿐만 아니라 그들 정체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북청사자놀음’의 무형문화유산을 전수함으로써 ‘스스로가 된다’고 믿으며 공동체 의식을 되살린다. 실향민 2세는 어떠할까? 이에 대해서 다음 절에서 논의 할 것이다.

2) 속초사자놀음: 2세대 피난민의 정체성을 구현한 문화유산

현재 속초의 사자놀음은 노인 및 전문예술가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에게도 지역사회의 문화를 형성하는 한 부분이다. 1957년 초연 이후 속초에서 행해진 사자놀음의 전통을 재현하려는 노력은 피난민들의 추억을 떠올리기 위한 노력과 통한다. 2005년 속초문화센터에서 사자놀이를 복원하기 시작하였다. 무형문화재로서 사자놀음에 대한 자료를 아카이빙 하는 것에 속초에서 초연한 공연자들을 중심으로 동참하였다. 속초박물관은 2005년 피난민속촌과 함께 ‘아바이촌’을 개장하여 대표적인 문화와 산, 어업과 관련된 원주민들의 문화를 소개한다. 특히 북청사자놀음에 등장하는 사자와 그 가면도 전시한다. 박물관은 북청 사자놀음의 공연을 즐기고 춤을 추는 방법을 가르치는 교육 프로그램과 디아스포라의 민속 예술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이 박물관은 북한에서는 거의 사라진 민속 자료를 보존하고 이주 공동체를 방문하고 삶의 방식을 경험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미래 세대들에게 전달한다.

2005년부터 지역 예술가들과 주민들, 속초 2세대 이주자들로 구성된 함경남도청년집단이 이끄는 속초북청사자놀음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들은 놀음을 하고 그것을 연행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마을 공동체의 전면에 있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지역축제에서 안내 역할을 하며 대표적인 지역 전통공연으로 이를 공연했다. 결국 그들은 수집, 발견, 보전, 보존을 목적으로 2013년 ‘속초사자놀음보존회’를 창설하였다. 그들 조상의 무형문화유산을 전승, 전환 및 창조적으로 재해석하였다. 이것은 이들의 유산을 되살리는 것의 기반이 되는 사회의 연대를 강화시킨다. 그들은 퉁소 수업과 축제, 사자춤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였다. 청호초등학교의 학생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다. 창립 이래 대표직을 맡아 온 김성하 씨는 청호동의 ‘아바이 마을’에서 자란 이주민의 2세대 구성원이다. 그는 사자놀이의 원형을 발견, 보존 및 성공하면서 속초의 발전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매년 정월대보름 청호동의 전통시장을 방문하기도 하고[사진 5] 2017년 6월에 열린 ‘디아스포라 문화 축제’에 초청되어 속초를 기반으로 한 북청사자놀음 ‘속초사자놀음’이 관객들과 교류하였다.[사진 6]

흥미로운 점은 디아스포라 2 세대 구성원들이 구성한 속초사자놀음보존협회는 ‘북청사자놀음’이 아닌 ‘속초’사자놀음이라 불리기를 원한다. ‘속초북청사자놀음보존회’라는 이름으로 이주민 1세대들이 관리하였다. 그러나 사회의 구성원인 2세대는 더 이상 그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하지 않으며, ‘속초사자놀음보존회’라는 명칭으로 ‘북청’을 제목에서 제거하고자 한다. 김성하 대표에 따르면 이 보존회는 서로 다름 이름으로 명명된다. 실향민 1세대인 고령자들은 북청사자놀음에서 ‘북청’을 생략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자가 그들 앞에서 속초북청사자놀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두 번째 세대는 속초사자놀음보존협회라고 불리고 싶어서 속초사자놀음이라고 부른다. 속초사자놀음의 명칭 하에 강원도무형문화재의 지정을 신청할 것이다. 이것은 기원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데, 첫 번째 세대는 북청이 고향인 북청 사람들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두 번째 세대는 속초 사람으로 인식된다. [그림 1]

처음에 북청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사자놀음을 보았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북청사자놀음’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속초에 정착하는 동안 해가 갈수록 ‘속초북청사자놀음’이라고 불렸다. 두 번째 세대는 북청사자놀음을 사자놀음의 원형으로 인정하면서도 ‘속초사자놀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자놀음은 북청의 유산이다. 그러나 그들은 시대의 사회적 조건을 반영하여 새로운 내용을 추가함과 동시에 원형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러한 측면은 무형문화유산을 다음 세대로 전승시키는 과정에서 재창조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속초사자놀음회관과 속초문화회관은 ‘강원도무형문화재’로 등록된 속초사자놀이 마을을 찾으려고 하고 있다.


결론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형문화유산은 진행 중인 생활 양상을 포함한다. 따라서 고정된 형태로 표준화 하는 것은 이상적이지 않다. 무형문화유산의 제도화는 유형문화유산의 전시와 마찬가지로 화석화의 위험성이 높다. 특히 보유자, 전수자 및 이수자가 유지하는 ‘인간문화재(Living Human Treasure)’제도는 지역사회에서 세대 간의 교수/학습을 통해 실천하는 것으로 제한되어 있다. 무형문화유산은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지역 사회 구성원이 수행하고 즐기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공개행사로서 청중 앞에서 무대 공연이 반드시 관련 공동체와 분리되어 무형문화유산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형문화유산은 어느 정도 시스템 덕택에 보호되고 보전 될 것이다. 우산이 ‘상속받았다’라는 의미에서 원형의 보존에 대한 공통적인 근거를 찾는 방법을 논의하는 것이 시의적절하다. 무형문화유산의 주요요소는 a) ‘자기식별, 문화유산의 창작자와 소지자의 문화적 정체성에 필수적인 요소, b) 문화유산의 역사적, 사회적 진화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지속적인 재창조, c) 유산과 창조자의 동일성 d) 유산의 진실성, e)무형문화유산과 인권의 상호 관계 등이 포함된다(Lenzerini 2011). 이 논리를 속초사자놀음에 적용하면, 해당 지역사회의 무형유산과 정체성의 관계가 원형보존 및 전승 측면과 함께 논의 될 것이다.

첫째, 자기인식의 관점에서 볼 때, 문화유산의 창작자이자 소지자인 공동체는 1세대 디아스포라 구성원들에 의해 복원된 북청사자놀음의 원형을 발견, 보존 및 계승함으로써 사자놀음을 존재하게 한다. ‘북청’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그들은 정월대보름의 전통에 따라 가족과 지역을 위한 축복을 기원하며 청호동을 돌아다닌다. 그들은 원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자놀음의 원형을 재창조하여 사람들의 삶에서 살아있는 유산을 유지한다. 그들의 춤은 그들이 자신을 북청 사람들의 자손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피난민들의 자손으로서 현재 그들의 고향인 속초와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관련 공동체와 집단의 역사적, 사회적 발전에 대한 지속적인 재현의 관점에서 여러 마을 공동체가 경연을 개최하면서 사자놀음이 창조되고 재창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개인들과 공동체는 자체적으로 사자를 만들고 명명하였다. 사자놀음을 연습하고 스스로를 위해 극에 참여하는 것은 참가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확증하고 전텅을 젊은 세대로 전달함으로써 연속성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속초에 정착한 2세가 북청사자놀음을 ‘속초사자놀음’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속초 지역의 다양한 축제와 행사에 초청되어 초대 세대보다 더 풍성한 이야기를 재창조한다.

셋째, 정체성과 관련하여 한국 전쟁이 끝나자마자 북청 피난민들은 북청사자놀음을 수행하였다. 그들은 당시까지 국가 분단의 상황이 계속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극을 시작하였다. 이 사자놀음을 통해 그들은 고통 받고 있는 고난을 극복하고 비극적인 상황에서 집을 떠나 살려고 하였다. 그들의 향수를 함께 다룰 때에, 그들은 고향을 잃어버린 고통을 공유하고 새로운 땅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다시 확립하였다. 사자놀음의 무형문화유산이 지역사회의 문화적 정체성을 구현한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도 속초사자놀음보존협회의 공동체의식은 지속되고 있다.

넷째, 유산의 진위여부를 조사하기 위해서 한국전쟁과 국가 분단의 외부 요소를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사자놀음은 남북한이 서로 큰 차이를 보인다. 북한에서는 문화원형이 퇴보하였다. 극은 북한의 정치 체제를 반영하여 양반(상위) 계급을 비난하는 노동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반대로 디아스포라의 사람들은 북한의 인권, 즉 한국의 문화적 권리라는 측면에서 자신의의자로 북청사자놀음을 자신의 문화에 편입시켰다. 특히 속초사자놀음은 지역감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지역사회에서 살아있는 표현의 측면을 조명한다. 이러한 점에서 무형문화유산의 진정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은 무형문화유산과 인권의 상호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무형문화유산의 지속가능성은 가혹한 환경에서 사람들의 생존욕구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 상류층이 일반적으로 즐기는 아름답고 뛰어난 제품의 유형문화유산과는 달리 ‘살아있는 표현’으로서의 무형문화유산은 역사상 거의 기록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계속 이어져왔다. 그들은 자신의 상속 재산을 전승시키고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자유롭게 실천된다. 이것은 아마도 무형문화유산의 가장 중요한 측면일 것이다. 인권의 관점에서 볼 때, 속초에서 자란 이산가족의 자손은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존중하는 양질의 교육과 훈련을 받을 권리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문화적 관행을 발전시킬 권리를 행사할 수 있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 자신이 선택한 문화생활에 참여할 수 있다.

속초사자놀음을 통해 조사한 바와 같이, 끊임없는 변화는 무형문화유산의 본질이다. 그러나 무형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보호하기 위해 더 진화된 접근법을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활표현으로서의 유산이 관련 공동체 및 집단의 삶에 어떻게 침투할 수 있는 지에 특별한 주의가 기울여져야 한다. 이를 위해 대중과 정부, 학계에서는 서로 협력할 필요가 있다. 속초사자놀음공원, 속초문화센터, 속초박물관 등 무엇보다도 문화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공동체와 단체들의 관심과 참여가 절실히 요구된다. 문화적 표현은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끊임없는 변화에 적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속초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속초 사자놀음의 의미는 조상과 자손, 그리고 남한과 북한의 중요한 연결고리임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