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농촌 전통과 물질문화에 대한 (공동)기획: 한국 완주의 사례 연구

Writer : 정성미(Seong-mi Jeong)
Year : 2019


개요


본 연구는 한국의 남동쪽에 있는 완주 지역 마을 사람들의 농촌 생활과 관련한 물질문화의 가치를 보존하고 보호할 필요성에 대하여 논의한다. 연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 시작한다. 한국에서 박물 관과 문화재 보호 정책이 실질적으로 문화자원을 보장하고 있는가? 농촌 마을의 주변화 된 문화들과 그곳의 물질문화는 또 어떠한가? 그것들은 모두 사라질 것인가? 그리고 이들 문화 자원이 상대적으로 현대적이기 때문에, 충분히 오래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리는 그것 들의 보호를 소홀히 하고 있는가? 본 논문에서 저자는 완주 지역 농촌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연구하면서 찾아낸 물질문화의 현재 지위와 특성들을 조사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유산으로서 가치를 얻는지에 대하여 논한다. 특히 저자는 다양한 문화 자원들 사이의 연결(link)을 통해 유형과 무형문화유산 사이에 관련성 (connection)을 찾고자 한다. 마을 사람들을 현장조사하고 인터뷰 함으로써, 마을 사람들은 마을과 마을 주민의 역사를 알 수 있고 그들 고유의 경험과 배경을 조직관리전시(curate)할 수 있는데, 이것은 농촌 지역에 있는 물질문화를 식별하고 과소평가된 이들 문화 자원을 구하는 통합적 접근법을 쉽게 하는 데 매우 중요한 방법이다.



서론

본 연구에서는 농촌 마을에서 발견되는 생활 유산의 가치를 보존하고 보장하는 것에 대하여 논의한다. 과거에 몇몇 농촌 사회 연구자들이 이러한 문화를 연구하였는데, 그들은 구세대로부터 전해오는 생활 방식이나 행동 양식에 초점을 맞추었다(최재율: 1986). 다른 연구자들은 이를 주변 지역의 자연 환경에 적응한 결과로 보았는데 여기에는 경제, 생활방식, 언어 양식, 사고방식 및 가치, 역사적 유물(artefacts)과 역사적 유적지가 포함된다(임상봉, 김화경: 2006). 이 두 가지 특성화가 모두 문화에 초점을 맞추고는 있지만, 이전 연구들은 문화적 총체성, 추상적 양식, 그리고 농촌 사회 역사에서 동떨어짐(remoteness)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물질적 및 비물질적 문화를 포함하는 생활 유산이 농촌 문화의 구체적이고 다양하며 풍부한 증거를 제공한다는 관점에서 농촌 문화를 조사하기로 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문화 자원이란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관련이 있는 물질 및 비물질 데이터로 정의된다. 한국의 제도적 보장 체계는 이 자원을 민속 문화재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따라서 문화재로 등록할 수가 없는데 이는, 이 자원들이 희소성, 예술성 또는 학계 인정과 같은 필요한 기준을 충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문화 자원은 조선시대 말, 일본 식민 통치 및 해방 시기 이래로 시대가 얼마나 변화해왔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현재, 농촌 전통과 물질문화로 이루어진 마을의 생활 유산은 관광 홍보, 전시 등을 통해 오직 지역 개발 자원으로만 인정되고 있다. 하지만 농촌 전통과 물질문화의 가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하다. 다양한 유형의 박물관에서 이 자원들을 보존하고 전시 하는데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생활 유산의 가치와 중요 성을 인식하는 데서 변화의 계기가 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중앙 정부와 지방 자치제의 새로운 문화재 정책이다.

문화 자원에 대한 인정은 전통적인 것에서 현대적인 것으로 확장되었고,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품목의 범위는 유명한 사람들의 재산에서 일반인이 소장한 품목으로 확대되었다. 전형 적인 예가 문화재청의 등록 문화재 체제인데 일부 지방 지자체에서 지정한 현대 문화 자원과 미래 유산 체제를 보존하기 위하여 만들 어졌다.

이와 동시에 여러 국립 및 사립 박물관에서는 자신들의 활동을 확대하여 최근 유산을 식별하고 이에 가치를 매기며, 국가와 지방 에서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물질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박물관에서는 일반 주제를 다루는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데, 인문학, 사회, 문화 및 예술, 그리고 인간적 가치들이 포함된다. 문화 자원은 어느 한 유형의 박물관에서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018년 1월 현재, 한국에는 박물관이 873개 있는데, 그 가운데 225개 박물관이 물질문화와 관련한 유물을 전시해왔다. 박물관은 그 범위가 민속 박물관, 역사박물관, 농업박물관, 대학 박물관, 환경박물관, 그리고 여성사 박물관에까지 이른다.

박물관에서 물질문화에 어느 정도 가치를 매길 것인지, 수집 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그리고 전시를 어떻게 개념화하고 디자인하고 발전시킬 것인지는 저마다 차이가 있다. 하지만 전시를 위한 내용을 준비하면서 현장조사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또한 많은 관심이 유물의 구매에 있는데, 역사와 출처를 세부적으로 기록보관(recording)하지 않은 채 품목을 구하는 판매상들로부터 구매한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 시작한다. 박물관과 문화재 보호 정책이 생활 문화재와 문화 자원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가? 농촌 마을의 주변화 된 문화와 그곳의 물질문화는 또 어떠한가? 그것들은 모두 사라질 것인가? 그리고 이들 문화 물질들이 상대적으로 현대적이어서 우리가 그것들을 충분히 오래되었다고 여기지 않아 보존을 소홀히 하고 있는가?

궁극적으로 이들 질문은 농촌 마을의 생활 유산이 중요함을 인정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이 논문에서 저자는 농촌 지역 주민들에게 설문 조사를 하여 식별하게 된 생활 유산의 현재 지위와 특성에 대해 조사한다. 특히 저자는 다양한 양식의 문화 자원 간 연결을 통하여 유형과 무형 유산 간에 관련성을 새로이 만들고자 한다.



농촌 마을에서 생활 유산의 지위

연구자가 속해 있는 프로젝트 팀에서 2018년 9월부터 2019년 1월까지 완주군의 6개 면에 있는 170개 마을에 대하여 설문 조사를 하였다. 6개 면은 운정면, 화산면, 경천면, 비봉면, 고산면, 동상면 이다. 완주군은 산악 지대로 상대적으로 농지가 적고, 주된 농산품은 쌀, 콩류, 보리이다.

연구 대상이 된 여섯 개 지역은 완주군에서 산악 지대에 속하며, 감, 대추, 밤, 대두를 생산한다. 연구는 설문 조사가 진행될 마을의 수장들과 접촉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문화 물질들은 주민과 인터 뷰를 진행하면서 수집하였다. 연구자들은 방문 추천을 받은 마을 사람들의 집을 방문하여 현장 조사를 진행하였다.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 마을에 현대 품목과 함께 옛 품목을 여전히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주민은 매우 나이가 많았고, 따라서 이들 물질문화가 곧 쓰임이 사라질 위기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선별한 유물들을 조사하고 기록보관하고 보존하기 위해 몇 가지 절차를 따랐다. 첫째, 위치, 소장자 및 관리자의 이름과 주소 등 품목에 대한 기본 정보를 수집하고자 하였다. 둘째, 유형, 이름, 양, 제조자, 날짜, 사용, 물질, 구조 등 물질의 형태를 묘사하기 위한 데이터 분야들을 만들었다. 셋째, 유물의 제작 과정, 보수 상태, 보존 상태 및 역사적 배경 등의 데이터를 처리하였다. 또한 사물들이 그 소장자의 삶에서 갖는 의미와 이 의미가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변해왔는가가 고려되었다.

주민이 개인적으로 또는 마을 단위로 마을에서 생산하거나 보관 하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농기구와 집기들을 기록 문서화하였는데, 유물 가운데 많은 것이 유사하였다. 예를 들어 ‘건조시킨 감에 쓰는 칼’의 경우는 지정된 지역의 독특한 활동과 관련이 있다. 이 지역은 한국에서 건조시킨 감을 대량 생산하는 곳으로 알려졌다. 이런 유형의 칼인 곶감칼은 과일의 딱딱한 끝을 자르고 감의 껍질을 벗기는 데 사용된 도구이다. 손잡이는 나무로 만들고 날은 종종 낫의 끝을 잘라 만들며 칼은 보통 대장간에서 만들거나 아니면 마을 사람이 집에서 만든다. 날의 크기와 모양은 이 지역에서 생산된 감의 크기에 따라 다르다. 두리감은 설문 조사 대상인 마을의 토산품이며, 때문에 칼날은 이 감을 다루기에 충분할 만큼 작아야 했다[사진 1].

전통적 생강 보관 과정에 사용된 건물과 동물을 위해 사용된 쇠로 만든 광에 대한 정보도 의미가 있는데, 왜냐하면 이들 건물이 더는 존재하기 않기 때문이다. 생강 보관 건물은 생강을 몇 달간 보관하기 위해 지어졌는데, 영하 15도로 온도가 유지되어야 했다. 조사된 마을에서는 이 생강 보관소를 시앙굴이라고 불렀다. 대부분 마을 집들의 난방은 온돌 방식이었는데, 집의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열이 전달되는 방식으로 그래서 많은 마을 사람들이 마루 아래를 파서, 생강, 고구마, 무를 저장한다. 오늘날 기계식 저온 창고 건물들로 인해 이러한 관습은 거의 사라졌지만, 그래도 일부 생강 창고가 있는 집들이 아직 남아 있다.

생활 유산의 또 다른 측면들은 여성의 일과 관련이 있는데, 도투마리와 바디(전통적 직조 도구), 물레, 재봉틀, 빨래 방망이, 놋쇠 드럼, 맷돌, 놋쇠 다리미, 절구 및 다양한 주방 도구들, 그 밖에 삼베, 모시, 견직류와 같은 것들이다. 선물로 혼서지(혼례 서약서)와 사주 단지(신랑의 출생 년, 월, 일, 시에 관한 세부사항을 기록한 혼례 문서)와 같이 혼례와 관련이 있는 데이터도 또한 발견되었다. 이들 유물은 사회적 성(gender)과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집안의 계급 또는 부의 차이를 나타내기도 한다. 일부 더 가난한 정보 제공자들은 말하기를 결혼할 때 아무 것도 가져오지 않았거나 기저귀만 몇 개 가져왔다고 하였다. 반면 부유한 집안 출신의 다른 사람들은 긴 혼수 목록을 만들었다. 유교 영향 아래 이것은 모든 부귀한 집안이 따라야 하는 형식이었다.

몇몇 나이 든 여성은 혼례복과 혼례 서약서를 아직까지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혼서지(혼례 서약서)는 편지 형식을 취했고,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냈다. 사진 속 혼례 서약서는 김명현의 아버지, 김재덕(광산 김씨)이 써서 1959년 10월 28일 유고흥의 집으로 보낸 것이다[사진 2]. 다음은 서약서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날씨가 매우 춥습니다. 모두들 안녕하시길 빕니다. 저의 장남 김명현이 이미 다 컸지만 성인이 되기에는 아직 있어야 합니다. 귀하의 소중한 따님을 제 아이의 친구로 삼게 되어 저희 가문에 영광입니다. 따라서 양가의 의례에 축복이 있도록 제 성심껏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 세기 동안, 신부들은 혼례 서약서를 장 속에 두고 여생 동안 그것을 소중히 간직한다. 마지막 단계는 이 혼례 서약서를 혼례함 위에 놓는 것이었다. 석장 마을의 유영선(80세)은 시아버지가 쓴 이 혼례 서약서를 여전히 애지중지하며 지난 60년 동안 같은 장 속에 보관했다. 새마을운동(새로운 공동체 운동) 본부에서 발표한 부녀 대상과 같은, 수상 수집품도 발견되었다. 농촌 지역 새마을운동에서는 마을 지도자와 부녀회장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1970년대 마을 지도자들은 마을의 ‘가족 등록’을 관리하는 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83년에서 1987년까지, 지도자들이 쓴 연감인 새마을 영농 일지는 매일의 온도, 날씨, 그리고 강우를 정확하게 기술하는 데 사용 되었다. 예를 들어 기록보관물에 나타나는 바에 의하면 비봉면 지역이 참외 농사를 짓게 된 것은 1980년대 이후이며, 다양한 유형의 온실 또한 이 쯤 도입되었다. 악기(징, 꽹과리, 장구, 소고 등), 부의금 수집함과 요령, 연자방아, 묵주(종교적 실행과 관련한 품목들) 또한 발견되었다. 요령은 흔들면 아주 높은 소리를 내는 종으로, 마을 공동체가 망자를 애도할 때 사용하였는데(상여 방울)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이례적으로 긴 묵주(240cm)도 발견되었다. 성물로 구슬을 꿴 실로 되어 있고 한 쪽 끝에 십자가가 달려 있으며 천주교 신자들이 기도할 때 사용하였는데, 이를 이용하는 사람은 기도를 반복할 때 몇 번 했는지를 셀 수 있었다. 묵주는 가족 안에서만 쓰인 것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 함께 모여 기도할 때에도 쓰였다. 천주교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조선시대 말이며, 이 마을들에 들어온 것은 1839년 무렵, 기해박해 후였는데, 이는 충청도에서 많은 신자들이 그곳으로 와 정착하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농촌 마을에는 전쟁 유물이 남아 있는데, 가령 수류탄 고리, 지뢰, 비옷 끈, 탄약 창고이다. 용복마을에는 깃대가 하나 있는데, 이기순(89세)이 5년 전에 세운 것으로 수류탄에서 떼어 낸 부품들을 사용하여 만든 것이다. 그는 여전히 자랑스럽게 이 깃대에 남한 깃발이 펄럭이게 한다. 이기순은 한국전에 참전하였고 완주군 에서 많은 전투를 하였으며, 참전 경험으로 그 이후 많은 품목을 소장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 전쟁에 대한 기억은 그의 정체성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이들 마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생활 유산이 많다는 것은, 근대화, 효심, 농촌 리더십 그리고 새마을운동으로 인해, 또한 마을 공동체와 생활방식의 변화로 인해, 농업이 이들 농촌 지역에서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들 문화 물질이 현재와 같은 상태로 집에 여전히 남아 있는 이유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마을 사람들의 조직관리전시술(curatorship)을 통한 가치 찾기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온 시대에 대하여 각자 나름의 이야 기를 간직하고 있다. 그들의 부모, 배우자, 자식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가 독특한 개인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그것이 진짜 이야기 들이어서 이를 기록보관하고 보존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문화 유산을 사용할 때는 그에 앞서 지정 유물을 개인적으로 소지한 사람의 경험과 기억을 먼저 엄격하게 연구해야 하며, 그리하여 ‘문화유산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새로운 가치를 발견 하는 것’이라는 말이 참이 되게 해야 된다[사진 3].

생활 유산이 많은 측면에서 가지고 있는 깊은 진실은 그 대부분이 급속한 사회 변화로 인해 단명하거나 소실된다는 것이다. 2000년대 이후로 농촌 지역에 현대 주택의 수가 갑자기 증가하였고, 그 결과 유물이 버려지거나 고물상에게 싸게 팔려나간 사례가 많다. 설령 유물이 남아 있더라도 원 소장자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품목에 대한 전체 이야기를 알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들 유물의 문화적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마을 전체의 삶을 엄밀하게 조사하면서, 유물을 전시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에 더하여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마을 주민들이 자신들 소장품의 가치를 깨닫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이러한 유물이 있는 집을 설문조사할 때마다, 그 집에 남아 있는 물질들에 대한 목록을 작성하였다. 방, 마루, 부엌, 창고 등등에서 유물의 위치를 기록 문서화하였고, 마찬가지로 도구의 사용도 농업, 음식 준비와 주거지, 또는 의식 유물과 그 의미로 쓰는 것인지를 기록 문서화하였다. 연구에서는 이 특정한 집의 생활을 사진으로 찍었고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 보관하였는데, 여성에게 결혼 전과 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또는 집을 리모델링하기 전과 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리고 집에 부모, 형제 등 누구와 함께 살았는지 등이 포함된다.

이 설문조사 방법은 유물들에 대한 정보 제공자의 기억을 상기 시키는 인터뷰 환경을 제공하여, 그들은 기본적인 질문에 자신들이 잘 아는 것으로 대답할 수 있었고 유물에 대하여 구체적인 세부 묘사를 드러냈는데, 가령 유물들을 어떻게 얻었고 최근에 유물들을 어떻게 썼는지를 상세히 묘사했다. 이에 더하여, 유물에 대한 정보 제공자의 평가, 생각 또는 의견이 중요했는데 때로는 소장자, 가족 구성원 또는 마을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드러냈다.

마을 사람들이 자기 고유의 이야기를 조직관리전시할 수 있게 함으로써, 우리는 품목들을 조사할 수 있었고 그것이 전통 지식 및 실행과 관련하여 무엇을 나타내는지 식별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작두는 권방례(84세)가 볏짚을 자르는 데 쓴 도구였는데, 소에게 먹이거나 찰흙벽을 세우는 데 쓰려고 잘랐다[사진 4]. 소를 사육하는 것은 20년 전만 해도 흔한 일이었다. 농촌 지역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소가 마차를 끌거나 논을 쟁기로 갈았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소 사육이 사라지면서 작두 또한 사라졌다. 오늘날은 소에게 긴 볏짚을 먹이지만, 과거에는 사람들이 작두를 사용하여 볏짚을 더 짧게 잘랐는데, 그 이유는 길이가 짧은 볏짚이 음식물 찌꺼기와 함께 끓이기에 더 편했기 때문이다. 변화에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다. 첫째, 쟁기질과 써레질이 기계화되어 오늘날 소는 덜 중요하다. 둘째, 집 안 또는 집 근처에서 소를 키우는 일은 더럽고 냄새가 났으며, 위생에 대한 태도가 변함에 따라 이러한 관행이 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셋째, 오늘날 현대 보일러가 난방에 사용되어, 소똥을 연료로 쓰는 전통적 난로가 더는 필요 없어졌다. 또한 과거에는 아이들이 소를 돌보았지만, 요즈음은 아이들이 교육을 위해 도시로 가며, 따라서 오늘날 소를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다. 2000년대 초반 이후로 작두는 더는 필요가 없어져 사라졌다. 농촌 마을의 생활 유산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현대화의 다양한 측면들이 어떻게 이 연구를 복잡한 사회문화 연구로 만드는지를 알 수 있다.

여성의 수제품들은 다양하게 남아 있다. 외딴 마을 세 곳에 사는 유영선(80세), 이춘착(81세), 한보임(86세)이 각자 소장한 품목들에는 결혼 전에 만든 옷들, 다양한 수공예품과 도구들이 포함된다. 전통 사회에서 직조는 여성들이 행한 주된 가사일 가운데 하나였다. 삼베, 비단, 모시, 면과 같이 실을 잣는 일에서부터 베틀(길쌈)을 이용하여 실을 직물로 짜는 일까지 모든 과정이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부분 이었다[사진 6과 7].

한국인들은 늘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데, 그들의 수건이 그 완벽한 예이다. 여기에는 세수수건, 머리수건, 목수건, 발수건, 모발수건부터 땀을 닦고, 씻고, 목욕을 하고, 닦아내고, 문지르는 등의 지정된 사용에 쓰이는 수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포함된다. 유영선은 자신의 고향 마을인 비봉 마을에서 혼인했을 때 다양한 옷과 수건을 만들어 썼다. 그는 광목에다 꽃, 풀, 꿩을 수놓았다[사진 5]. 한 나이 든 여성은 자신이 젊었을 때 그 마을의 또래 여성이 모두 모여 수를 놓았던 것을 기억해냈다. 품목들은 유영선 집안의 지위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당시 신부의 혼례 목록과 관련이 있는 여성의 하위 문화를 말해준다.

1945년 해방 후에 견직물 산업은 점점 기울었지만, 그럼에도 농촌 지역의 몇몇 부유한 집안에서는 여전히 일상복으로 견직물을 만들어 쓸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수입실과 직물이 마을로 유입 되고 있었다. 우리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면직물이 종종 평상복 으로 사용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삼베 바지는 이춘착(81세)이 비봉에서 20세에 혼인할 때 받은 품목 가운데 하나였다[사진 8]. 이씨는 이전은의 자손으로, 아홉 자녀의 맏딸이었기 때문에 그의 시어머니는 신부의 혼례 목록에 신경을 많이 썼다. 심지어 결혼 후에도, 그는 시댁으로부터 종종 옷을 받았다. 삼베로 만든 바지의 주된 특징은 직물이 ‘숨을 쉰다’는 것이고, 그래서 더운 여름에 적합하다. 이 바지를 입은 사람은 시원하고, 빨기도 쉽다. 이씨에 따르면 그는 신부 혼례 목록에 있던 옷 들을 몇 년간 입었고 그 후에는 접어서 보관했다. 여성들이 입었던 전통적 한국 삼베 바지는 유행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자수는 한동안 한국의 예술성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한보임 (86세)의 자수 작품은 1945년 해방 이후 한국 자수에서 일어난 두드 러진 변화를 보여 준다. 특히 아크릴, 폴리에스테르, 모직 실과 같은, 산업적으로 생산된 새로운 물질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이선영: 1991). ‘금수강산’이라는 글자를 나타내는 이 작품은 한보임이 1949년에 만든 것으로, 이것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혼수 또는 신부의 혼례 목록을 위해 이 수를 놓았기 때문이다[사진 9].

요강 또는 한국의 실내용 변기 또한 중요하다. 이것은 설문 조사 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된 유물 가운데 하나였다. 요강은 집에서 방 어디에든 둘 수 있는 작은 침실용 변기이다. [사진 10]은 박정술 (71세)의 부모님이 사용했던 실내용 변기 또는 통을 보여 준다. 몇 년 전에 집에 불이 나서 많은 것이 소실되었지만, 박씨는 다행히도 가족 요강은 되찾았다. 박씨는 ‘아주 기쁘다’고 말했다고 한다. 요강은 한옥(전통 가옥)에는 필수품인데, 왜냐하면 화장실이 종종 집과 분리되어 있어서 밤에 화장실 가는 일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집에는 일종의 요강이 각 방에 있었다. 우리의 정보 제보자인 박씨는 1920년 즈음에 매우 추운 겨울에 연로하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요강을 시장에서 샀다고 하였다. 요강은 그의 보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는데, 지금은 돌아가신 그의 부모님을 그가 수발하던 때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는 요강을 사는데 쓴 돈으로 술을 사왔어야 했다고 말한 부친의 말을 기억한다. 한때 그는 요강을 매일 닦아서 부모님 방에 넣어 드렸는데, 지금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그에게 과거를 회상시켜 주고 있다.

요강은 전 계급에 걸쳐 널리 필수품으로 여겨졌고, 신부의 혼례 목록에서 가장 흔한 품목 가운데 하나였다. 이 품목은 때로 놋쇠로 만들었고 또는 다른 쇠들로 만들었다. 화정마을의 염용자(71세)는 혼인하기 전에 너무 가난해서 자신은 혼례 목록에서 두 개 품목만 가져올 수 있었다고 했다. 요강과 세숫대야였다. 또한 탈것이 주된 운송 수단으로 사용될 때 탈것(가마) 안에는 항상 요강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주로 상층 계급 여성들이 사용했다. 이 가마 요강은 아주 작았는데, 대략 남성의 주먹 크기였다.

많은 유물은 실제 사물이라는 점에서는 유형유산이고 또한 거기에 이야기가 얽혀있기 때문에 무형유산이기도 하다. 이는 광대한 분야 이다. 위에 언급한 현장조사를 통해, 무형문화유산의 가치는 주민 자신에 의해 직접 식별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주민이 자신의 삶과 소장품들에 대하여 자기 고유의 이야기를 ‘조직관리전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촌 생활의 유형 및 무형문화유산

최근 몇 년간 전시가 유물지향적인 것에서 무형문화유산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를 포함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최근 몇 년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개최한 ‘아리랑’과 ‘청바지’ 전시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설명하고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유물에 관한 기억을 설명하는 전시의 좋은 예이다. 유사하게 국립박물관에서 개최한 ‘해방 70주년’ 전시회의 70개 이야기는 해방 투쟁에 관하여 많은 개인적 관점을 주었다. 동진강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새 천년을 관통하여 진행된 한 전시회에 자신들의 삶의 이야기를 특별히 포함시켰는데, 이는 본 연구 방식과 유사했다. 하지만 우리가 접근한 연구 방식은 외부 연구자에 의한 해석이나 평가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이야기한 원래 이야기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작두, 요강, 기타 농촌 마을 지역에서 발견된 수제품과 같은 유물들이 통합적 가치를 갖는다고 인식했다. 이들 품목을 선택한 이유는, 이것들이 모두 흔한 주제의 예술품과 공예품에 속하고 무형문화유산의 하위범주에 속하며 존재론적 분석으로 설명될 수 있는 의미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론은 하나의 주제를 둘러싸고 있는 관계들을 나타낸다. 주의해야 할 것은 전문가가 관련 전문 용어들의 상대성을 확인해줄 때에만 비로소 존재론적 증거들은 신뢰할 만하다는 것이다. 존재론적 분석은 유사 용어들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사물과 이야기, 관념의 관계를 연구하는 것이므로, 분석의 정확성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통찰력이 필요하다.

작두, 요강 그리고 위에서 소개한 기타 수공예품들에 대한 존재 론적 분석이 [그림 1]에 나타나 있다. 작두는 집집마다 다른 형태를 취하는데, 소장자가 대장간에서 날을 구매한 후에 자기가 쓰기 편한 형태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요강은 놋쇠, 구리, 대나무, 도기 또는 나무와 같은 물질로 만들어져, 미학적 즐거움이 있을 수 있다. 집에서 만든 수제품들과 이를 만들기 위해 사용한 도구들 또한 가치가 있는 유물들로 베틀과 물레도 포함된다.

다른 한편으로, 생활공간(정주 공간이라고 불리는 정착 공간)은 작두(볏짚 자르는 도구)와 요강(실내용 변기)과 같은 유형 사물들을 통해 잘 표현될 수 있다. 볏짚 자르는 도구는 전통 가옥에서 난방과 취사를 둘 다 할 수 있는 체계인 온돌의 사용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화장실이 옥외에 있고 본채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 전통 적인 침실용 변기 또한 기본적이었다. 다음 문장들이 이러한 감정 들을 잘 나타내준다. ‘부모님이 밭에서 일하느라 바쁜 동안, 아이가 소에게 먹이를 주려고 볏짚 자르는 도구를 쓰다가 자기 발을 다쳤다’, ‘자녀들은 깜깜한 겨울밤에 부모가 화장실에 가는 것이 걱정이 되었고, 그래서 부모들을 위해 침실용 변기를 가져다 놓았다’, ‘시집을 간 한 여성이 자기 부모가 그리워서 부모에게 혼례 선물로 받은 삼베로 그들의 옷을 지었다’ 이들 예는 모두 한국의 효 개념과 관련이 있다.

대전의 한국효문화진흥원의 2019년 효문화교육프로그램에는 전통 예절, 차 체험, 양반(귀족 계급) 체험, 식탁 예절, 그리고 효 교육이 포함된다. 그 밖에도 한복(전통 의복) 만들기, 차 마시기 그리고 식탁 예절이 또한 자주 다루어졌다. 앞서 예들을 통해 보았 듯이, 볏짚 자르는 도구, 침실용 변기, 삼베옷과 같은 유물은 또한 중요한 무형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사회적 관습, 도덕, 그리고 의식이 거기에 분명히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요강과 수제품들에 공통적인 흔한 가치는 이들이 모두 혼례 목록에 있었다는 점이다. 신부의 혼례 목록은 비록 개인의 계급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목록에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신혼부부에게 혼인 후의 삶을 준비시키는 일들에 대해 세부적으로 묘사하였다. 이에 더하여 여성의 수공예품은 현대 사회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데이터를 제공하였다. 우리는 1940년대와 1950년 대에 상층 계급 여성들이 혼인 전에 또래들과 함께 어떻게 ‘신부 수업’을 들었으며, 수입 실과 직물이 농촌 마을에 도입된 이후로 전통 자수와 바느질 기법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들 유형 품목들을 통해 우리는 이 품목들이 나타내는 무형문화유산과 연결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무형문화유산은 유형 사물들 속에서 구현될 수 있다. 박물관에서 사물들을 그 이야기와 함께 수집하여 진열할 때, 전통적인 유형 유산과 살아 있는 무형 유산은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향수의 자리를, 그리고 젊은 사람들에게는 교육의 자리를 제공할 수 있다.



결론

살아있는 유산의 경우에는 그것의 전달이 종종 끊어진다. 그러 므로 이와 같은 데이터를 보장할 필요가 있음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특히 일상생활 또는 가정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데이터의 경우, 세대 간 이동 방법은 인간 상호작용이 더 많아질 수 있는 참여의 방법으로 변경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역 박물관 에서 지역 생활방식과 주변 문화에 대한 기억을 보존해야 한다.

박물관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유물을 수집한다. 획득한 유물은 창고에서 적절한 보관 환경으로 보존하며, 전시회에서 발전시켜 나갈 계획들의 원 데이터로 사용한다. 다시 말해 지정된 전시회를 계획할 때 박물관 직원은 소장 유물들을 검토한다. 그러나 국립박물관에는 수백 개의 유물이 있는 반면, 소규모 박물관에는 소장 품목이 거의 없을 수도 있다. 박물관 전시는 넓게 상설전시, 임시 전시, 소장품전시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한 박물관 공무원(47세)이 말한 ‘비 국립 박물관의 경우 박물관 내 유물을 사용하는 비율은 10% 다’라는 증언에서 알 수 있듯이, 유물들은 개인 소장자 또는 다른 박물관이나 기관에서 빌려와야 할 지도 모른다(개인 인터뷰, 2019년 1월 3일). 이런 전시를 준비할 때는 현장조사보다는 학계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재정, 인력, 준비 시간의 한계 때문에, 대부분의 소규모 박물관은 기존의 기록문서로, 다른 기관으로부터 사물들을 빌려서 그리고 동료들과 소장가들과의 개인적 관계망을 통해서 내용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경우, 보관된 유물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거나 유물에 접근할 수 있는 기록문서가 충분하지 않다. 실상 박물관에서 유물의 기록보관물 가운데 옛 것이건 현대 것이건 간에 세부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유물에 대해 충분한 데이터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현장조사를 하고 문화 물질과 정보를 함께 수집 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나이가 많은 농촌 마을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을 때 그들을 현장 조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이들이 과거의 사건들, 일상적 삶, 또는 마을의 중요한 최근 변화들에 대해 기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 농촌 마을에 의미 있는 유물이 아직 많이 있고 이것들에 대해 기술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이 든 주민들 뿐이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이러한 방식으로 데이터를 수집한다는 것은 주민이 그저 주제라기보다는 자기 고유의 유산에 대한 조직관리전시자가 된다는 것이고, 우리에게 마을의 역사, 자신들의 개인적 역사, 그리고 사회적 관계들에 대하여 이야기해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문 연구자들로 하여금 현장조사를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게 함으로써, 우리는 유형과 무형 유산 모두의 가치를 식별할 수 있다. 이 방법에서는 유형 물질의 실제 ‘이야기’에 주목하며, 기존의 유형 문화재 평가로는 포함시킬 수 없는 방법들로 그것을 의미 있게 만든다.

한국에서 무형문화유산과 관련하여 전시된 유물들은 유물 소장자의 일상생활, 전통 공예품을 제작하는 공예가가 사용하는 도구, 아니면 의식에 사용하는 장신구들과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위에 언급된 예들을 통하여 나타났듯이, 다른 유형의 물질문화에도 무형문화유산의 가치가 포함되는데, 과거 사람들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과 문화를 알 수 있는 내재적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농촌 마을을 설문 조사하면서 우리는 마을 사람들이 자기 마을의 역사를 책의 형태로 작성해주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실제 마을 주민들의 문화 자원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와 분석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급속한 현대화와 산업화가 함의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데, 지역 전통, 농촌 마을 문화와 관련이 있는 기억 및 물질문화가 빠르게 변하고 있고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 유물은 유물의 소장자에게서 인터뷰 데이터를 직접 얻어야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유산 설문 조사와는 다르다. 구술 기록문서는 유물과 관련한 소장자의 감정과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도움을 주며, 이는 우리의 이해를 최대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것은 지역 사람 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기억과 품목들이 가치가 있음을 깨닫게 함으로써 문화유산을 보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 설문 조사가 진행 되면서 마을 어른들에게서 그들이 소유한 유물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주민들에게는 자신의 문화유산에 새롭게 가치를 부여하는 기회로 발전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외딴 농촌 지역의 문화 물질이 중요 하다는 의식을 높일 수 있다. 미래에 현장 연구자들은 마을 사람들이 지켜 온 문화 유물에 대해 활발하게 설문 조사를 하고 여기에 내재한 무형문화유산의 가치를 탐색해야 한다. 이러한 목적에서 본 논문은 완주군의 문화 유물에 대하여 존재론적 분석을 제시한다. 이 문화 유물들은 과학기술, 지식, 가치, 상징체계,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사람 들이 나누는 사회적 대화의 문화적 결과이다. 박물관이 유형유산과 무형유산 둘 다를 제시할 수 있었으므로, 매우 유용할 것이다.

이제는 박물관이 사물의 양보다는 정보의 질을 추구할 때가 왔다. 연구와 설문 조사, 전시와 대중 공개를 통해, 박물관은 사람 들의 물질문화에 있는 핵심 가치들을 찾아야 하고 그것이 중요함을 인정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희귀한 내재적 가치 또는 예술성’이 ‘문화재’의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품목에 요구되는 품질들이지만, 여기서 보았듯이 다른 품질들 또한 중요하다.

마을에서 찾을 수 있는 유물은 그 범위가 제한적일 수 있고, 품목들 가운데 많은 수가 똑같아 보이거나 또는 유사하게 사용되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많은 품목이 그와 관련된 이야기 들을 가지고 있고, 그 이야기들이 품목을 다르게 만들고 중요하게 만든다. 이들 유물은 종종 과소평가되고 있다. 이것들을 문화재로 인정할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